정장차림의 순종
대한제국(大韓帝國) 최후의 날 ― 홍사중(洪思重)(조선일보 논설고문)― 1910년 8월 22일도 오늘처럼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이날 오후 1시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의 흥복헌(興福軒)에서 순종(純宗)이 대신들과 함께 어전회의를 열었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어전회의였다.
한참 동안 더위에 눌린 듯 침묵이 흐른 다음 순종은 다음과 같은 조칙(詔勅)을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 내렸다. 『짐은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해 한․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써 서로 합하여 일가가 됨은 서로 만세(萬歲)의 행복을 도모하는 소이로 생각하고 이에 한국의 통치를 통틀어 짐이 매우 신뢰하는 대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도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어 순종은 전권을 내각총리 대신 이완용에게 일임할 테니 통감 데라우치를 만나도록 하라고 일렀다. 그러는 동안 대신들은 아무말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궁중에서 물러난 이완용은 오후 4시에 데라우치 통감을 만나서 다음과 같은 조약문서에 조인했다. 『제1조. 한국 황제페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 그리고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페하는 전조(前條)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전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 대한 제국의 마지막 날은 이처럼 어이없이 저물어갔다. 그러나 나라가 망한 것은 이때가 아니다. 1907년의 정미(丁未) 신 조약으로 사법권과 행정인사권을 넘겨줬을 때 우리는 이미 국권을 상실하고 있었다. 더 정확히는 1905년 11월의 을사「보호」조약을 맺기 훨씬 이전부터 나라는 완전히 결단나고 있었다. 우리는 망국의 모든 책임이 마치 이완용을 비롯한 이른바 매국의 오적(五賊)에게만 있는 듯이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매국이 분명하다면 그들을 대신으로 만든 임명권자의 책임 또한 왜 묻지 않는 것일까? 1884년 겨울에 서울에 와서 고종(高宗)을 처음으로 가까이서 본 미국인 퍼시발 로웰은 이렇게 그의 인상을 묘사했었다. 『그의 얼굴은 뛰어나게 부드러워 보였다. 그것은 첫눈에 호감을 갖게 하는 그런 얼굴이었다』한마디로 사람은 좋지만 매우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인물 같았다는 것이다. 황태자 시절의 순종에 대해서는 또 이렇게 말했다. 『그가 나를 접견했을 때 두 대신이 그의 양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할 때마다 대신들이 허리를 굽히고 그의 귀에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가를 속삭여 주곤 했다. 그러면 그는 동상처럼 무표정하게 서 있다가 앳된 목소리로 대신들이 속삭여 주는 말을 그대로 따라 외우는 것이었다』 이런 어린 황태자도 그때 20대의 황제폐하가 되었다. 조금이라도 기골이 있었다면 마지막 몸부림이라도 칠 수는 있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역사책은 「순진하고 무기력한」순종이 매국의 대신들에게 놀아났다 고만 적고 있다. 그 뒤에는 비록 퇴위한 다음이라 해도 고종(高宗)이 있었다. 그러나 태 황제(太皇帝)라는 어마어마한 칭호를 갖고 있던 고종『합병은 천명(天命)이다. 지금은 어떻게도 할 수가 없도다』며 탄식만 하고 있었다.
물론 고종으로서는 별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만약에 반세기 가까이나 왕위에 있던 그가 좀 더 영특한 임금이었다면 나라의 운명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보호조약 체결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에도 기진한 고종은 그냥 궁내부대신 이재극(李載克)에게 「정부대신들과 잘 협의하라고』분부했을 뿐이었다. 또 이완용이나 두 임금 모두가 합병에 따르는 왕실의 예우 문제니 친일 고관 대작 들의 처우에 대해서만 일본측과 흥정을 했을 뿐 만백성의 운명을 걱정하는 말은 없었다.
매국노 이완용
우리의 불행은 이완용과 같은 매국의 대신들을 가지고 있었던 데 국한되지 않는다. 고종, 순종과 같은 무능한 최고 권력자를 모셔야 했다는 것이 우리의 다시없는 불행이었다. 민영환(閔泳煥)으로 하여금 자결케 만든 것도 「충언(忠言)이 무익(無益)」하며 「상소(上疏)가 불용(不容)」이라는 절망감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직접 국민앞으로 유서를 썼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국민에 대한 채찍이기도 했다.
최린(崔麟)의 일기를 보면 대한제국이 사라진다고 공포된 날에도 종로의 상인들은 다른 날과 다름없이 문을 열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겠다며 일제와 싸운 열사, 투사들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러나 친일파는 이들보다 몇 곱 더 많았다.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됐을 당시의 군대란 군악대(軍樂隊) 2백 명을 합쳐서 서울에 5천명 지방에 2천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나마 몇 달씩 급료를 받지도 못하고 총탄이며 화약도 없었다. 그것은 자주 독립할 수 있는 나라의 군대가 아니었다. 이처럼 우리가 너무나도 만만했으니까 일본이 감히 남의 나라를 제멋대로 삼켜먹겠다는 야욕을 가질 수가 있었다.
통치자의 뛰어난 지도력과 드높은 국민의식 그리고 강대한 국력이란 나라를 지탱하는 세 개의 기둥이다. 그 세 개 중 어느 하나도 없던 대한 제국의 운명에서 우리는 배우는 것이 있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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