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

「화냥년」과「호로자식」이라는 말의 연유

덕여 (悳汝) 2011. 7. 31. 19:02

 

 

「화냥년」과「호로자식」이라는 말의 연유


우리는 남자관계가 복잡한 여자를 “화냥년"이라 하고 또 버릇없고 막 되먹은 사내자식을 “호로자식”이라 한다.

이 말의 연유를 알아보자.

 

 

조선 仁祖朝 丙子胡亂을 당하다.


서기1636년 後金은 국호를 淸으로 바꾸고 황제라 칭하였다.

조선에 대하여 兄弟관계를 폐기하고 새로 君臣관계를 맺고 공물과 군사 3만 명을 지원하라고 요구하였다.

조선이 거부하자 12만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淸軍에 밀린 朝鮮軍은 남한산성에 들어가 1만 3천의 군사로 진을 쳤지만 세력의 열세로 45일 만에 항복하였다.

仁祖는 삼전도에서 삼饋구고배를 하고 淸과 君臣(군신)의 義(의)를 맺었다.

그리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보내고 斥和論(척화론)을 주장하던 홍익한 오달제 윤집 등을 淸으로 보냈다.

뿐만 아니라 청군들은 철수하면서 많은 조선인들을 끌고 갔다.

 

 

☆ 淸에서 돌아온 還鄕女를「화냥년」이라고 부르다.


仁祖의 굴욕적인 항복으로 전쟁이 끝이 났다. 온 나라가 전쟁이 끝났음을 좋아하기도 잠깐, 백성들은 궁궐 앞에 모여들어 淸나라에 끌려간 딸과 며느리, 아내를 구해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仁祖는 淸나라에 끌려간 인원을 조사해 보니 대부분 婦女子들로서, 그 수가 무려 60만 명이나 됨으로 淸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백성들을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 당하였다.

그리고 淸나라는 끌고 간 조선인들에게 등급을 매겨놓고 엄청난 돈을 요구함으로 仁祖는 하는 수 없이 백성들이 각자 재산을 팔아서 돈을 마련하여 청나라에 가서 부녀자를 데려오도록 하였다.

속환금을 물고 상당수의 女子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淸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女人들을 還鄕女(환향녀)라 부르면서 동네에서 고생하고 돌아왔다고 위로를 해주었다.

그러나 못난 남정네들은 나라와 여인들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책임은 뒤로하고 이 여인들이 국내로 속환되어 오자 포로로 끌려간 것만으로도 정절을 잃은 양 취급하고, 가문에 속환된 여인이 있음을 수치로 여기고 여인들이 스스로 삶을 포기토록 구박과 멸시를 하였다.

환향녀들은 자신의 순결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자결을 하기도 하고, 청군에 더렵혀진 여인이라는 주위의 멸시와 구박에 고향을 뒤로하고 떠도는 슬픈 신세가 됐다.

 

이에 인조는 환향녀로 인한 사회적 문제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서 대동강 한강 낙동강 섬진강 영산강 등을 회절강(回節江)이라 이름하고, 환향녀들로 하여금 이 강에서 몸을 씻도록 한다.

비록 환향녀들이 절개를 잃고 몸을 더럽혔다고는 하나 이는 나라가 처했던 전란의 탓이지 어찌 여인들 스스로의 잘못이냐면서 민심의 흉흉함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회절강(回節江)에서 몸을 씻는 것으로 환향녀들의 어두운 과거를 묻고 따듯이 맞아들이도록 하라는 조치였다.


이때부터 오랑케에 끌려갔다 돌아온「還鄕女」를『화냥년』이라고 부르며,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환향녀의 자식을 호로(胡虜)자식이라 부르다.


그러나 환향녀들 중에는 돌아올 때 이미 임신을 한 경우가 많았다.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 임신한 환향녀들이 자식을 낳았다. 세상은 그녀들이 낳은 자식을 호로(胡虜)자식 즉 오랑케의 자식이라 하여 냉대하고 멸시했다.

따지고 보면 환향녀나 호로자식들은 멸시의 대상이 아닌 보호받고 위로받아야 할 불쌍한 피해자들이었다.

왕은 국가의 안보를 튼튼히 하지 못하고 전쟁에서 대패하고 항복하였고. 신하들은 뿔뿔이 도망가기 바빴고. 군사들도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결국 나약한 여성들이 청국에 끌려가서 그들의 노리개가 되고 처참한 노예생활을 하다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잘못을 불쌍한 이 여인들에게만 뒤집어씌운 가슴 아픈 역사의 한 단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