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

딘 소장의 평양 생활 - 포로수용소 통역 이규현 진술서

덕여 (悳汝) 2011. 7. 31. 08:32

 

제목: 딘 소장의 평양 생활

                                     - 한국전 포로 딘 소장의 통역 이규현이 포로수용소에서 작성한 진술서

  필자: KISON

  출처: 미 국가문서기록보관소(NARA), 헌병사령관실 문서(RG 389)(kn-582)

  편집자 주: (다시 퍼옴)

 

  1950년 8월 한국전 당시 전북 진안에서 북한군에 포로로 잡혀 3년간 포로 생활을 하다 1953년 종전 후 석방된 미 24사단장 윌리엄 딘(William F. Dean) 소장의 평양에서의 포로 생활을 증언한 한글 문서이다.

  이 증언은 딘 소장의 평양 포로 생활 당시 딘 소장의 통역을 맡았던 김일성대학 영어강사 출신인 북한 민간인 이규현이 1950년 10월22일 미 24사단에 귀순해 부산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인 1953년 4월7일 진술한 것으로 전체 분량은 가로*세로 15 x 21cm자리 메모용지 36매이다.

  이 문서는 한국 국립중앙도서관이 2004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해외소재 한국관련 영인자료 수집 작업으로, 미 국가문서기록보관서의 헌병사령관실 문서(RG 389,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Provost Marshal General, 1941 ~)에서 발굴한 것이다.


  이 발굴 문서에는 이규현의 자필 진술서 외에 이규현의 석방청원과 특별사면을 다룬, 유엔사령부 전쟁포로 제2캠프와 전쟁포로사령실(HQ, Prisoner of War Command)간의 교신 문서 등 이규현과 관련된 3건의 다른 문서도 포함되어 있어, 딘 소장 개인의 포로생활 외에도 한국전 당시 북한출신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이규현의 출신배경 등을 엿볼 수 있다.

  딘 소장은 석방 다음해인 1954년, 자신의 포로생활을 비롯해 한국전 경험을 기록한 단행본을 출간했는데, <딘 장군 이야기(General Dean's Story)>라는 제목의 책에서 그는 이규현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으며, 당시 상황에 대한 묘사에서도 이규현의 진술 내용과 대부분이 일치하고 있다. 딘 소장은 이 책에서 통역인 이규현의 첫 인상을 '사복을 입은 아주 유쾌한 표정의 한국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평안남도 강동군 출신으로 1922년생인 이규현은 딘 소장을 만났을 때 28세였으며, 딘 소장이 평양을 떠난 후 1950년 10월 10일 소속인 내무성을 탈출해 미24사단을 찾아갔다. 이규현은 이 진술서에서 '다행히도 기회가 좋아서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도주하였다. 그리고 평양시내외의 여러 곳에 숨어 있다가 유엔군이 입성하자 미군 제24사단을 찾아가서 딘 장군에 관한 사실 일체를 보고하고 그의 구출에 협력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라고 적고 있다.


  이규현의 진술서에는 본인이 미 24사단을 찾아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규현은 이후 1953년 6월 6일 석방될 때까지 포로수용소 생활을 하게 된다. 1952년 12월 16일, 부산에 주둔하고 있던 유엔사령부 전쟁포로 제2캠프에서 이규현의 석방청원 건을 전쟁포로사령실(HQ, Prisoner of War Command)에 발송한다. 이 문서에는 이규현이 두 번째 석방청원을 했으며, 특별 사면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규현의 석방 청원은 이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북한 민간인' 신분이었던 이규현의 기록을 검토한 결과 부산 제2캠프에서는 '현재까지 진척된 조사에 근거할 때 현행 기준 하에서는 석방될 수 없다.' 는 판단을 한 것이다. 이규현의 개인 기록철에는 '이동 금지(Do Not Move)'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이규현 개인은 물론 개인기록을 다른 곳으로 전출시켜서는 안 된다는 표시였다.

  더불어 이 문서는 이규현의 석방 청원에 대해 두 가지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즉, 포로 당사자에 대한 필요한 배경조사를 위해 이규현 건을 유엔사령부 전쟁포로정보국으로 넘겼으면 한다는 것과, 만약 이규현에 대한 사실이 거짓이 없는 것으로 판명될 경우 석방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같은 날, 한국지역병참사령부(HQs Korean Communications Zone)에서도 일본에 있는 미 극동군사령부에 이규현 건에 대한 전문을 발송한다. 부산 2캠프에 있는 이규현 기록철에는 '이동 금지' 표시가 되어 있으나, 전쟁포로사령실 중앙기록부파일에는 이 표시가 되어 있지 않으며, 본 사령부헌병감실의 전쟁범죄과에 확인해 본 결과 이규현이 전쟁범죄자로 분류되어 있지 않고, 체포된 후 범법 행위를 했거나 범법 행위에 대한 증언이 없다는 점을 알리고 있다. 석방 조치가 가능하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하지만 1953년 4월 6일, 연합군사령부의 전쟁포로사령실은 한국지역병참사령부에 이규현 건과 관련, 지금 당장은 어떤 조치도 할 수 없다는 내용의 답신을 보낸다.

  '청원인은 딘 소장이 북한군에 포로가 된 이후 딘 소장의 통역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본 사령실에서는 청원인의 주장을 확인할 기록이 없음. 상급부대의 정책결정이 있어야 하므로 본 사령실은 본 건 처리에 대해 어떤 권고도 할 수 없음.

  그러나 극동군사령부는 1953년 5월 22일 이규현 석방을 결정한다. '포로 이규현의 청원'이라는 제목의 문서에서 극동군사령부는 클라크 극동군사령관의 명령으로 이규현의 석방을 결정했음을 통보하면서, '포로 이규현이 전쟁포로 신분에서 해제되어 대한민국으로 '귀환(Homecoming)'토록 함. 이라고 쓰고 있다.


  이 문서에는 이규현에 대한 석방절차는 본인의 지문이 찍힌 유엔사 문서양식8을 작성한 후 유엔사령부전쟁포로정보국(UNC Prisoner of War Information Bureau)에 제출함으로써 완료된다고 되어 있다. 다음은 이 문서에 첨부되어 있는 이규현의 영문이력서를 번역한 것이며, 아래 본문은 이규현의 자필진술서 전체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1953년 6월 6일 석방.

이름: 이규현

생년월일: 1922년 4월 27일

출생지: 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대성리

현주소: 평양시 신양리 176


교육 및 경력 사항

1929년 4월: 평안남도 안주군 입석면 신리, 신리 소학교 입학

1935년 3월: 소학교 졸업

1935년 4월: 경기도 개성, 송도 고등보통학교 입학

1938년 3월: 송도 고등보통학교 3년 수료

1938년 4월: 일본 후쿠오카 현 모지, 모지 중학교 4년에 편입

1940년 3월: 모지 중학교 졸업

1940년 4월: 일본 도쿄, 제6도쿄 중학교 보충반 편입

1941년 4월: 일본 도쿄, 제1와세다 고등학원 인문계 입학.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수학

1943년 9월: 제1와세다 고등학원 졸업

1943년 10월: 일본 도쿄, 와세다 대학 문학부 입학

1944년 1월: 도쿄에서 일본군에 징집

1945년 8월: 징집 해제된 후 북한으로 귀한

1945년 10월: 평양시 제5평양 중학교 영어 선생으로 임명됨

1946년 10월: 평양시 제2평양 중학교로 전출

1947년 6월: 김일성대학 예과 강사로 전출. 영어 가르침

1948년 2월: 영어 과목 폐지되면서 예과 강사자리에서 물러남. 같은 대학 대학원에 진학해         일반언어학과 음성학, 한국어 전공. 탁월한 러시아어 구사능력 인증 받음. 외국어           문학부의 영문학 졸업시험 통과. 일반 언어학 및 읽기 실습강사로 임명됨

1950년 7월: 징집명령으로 북한 내무성의 임시통역 및 번역요원에 배치되었으며, 김일성대         학의 대학원 학생이자 강사신분 유지.

1950년 10월 10일: 내무성에서 탈출

1950년 10월 22일: 평양에 주둔 중이던 미 24사단에 의해 전쟁포로로 체포됨

(1950년 12월 14일 작성)

 

   

  *** 한국전 포로 딘 소장의 통역 이규현이 포로수용소에서 작성한 한글 진술서

  

  본인은 국련군(國聯軍) 제2포로수용소 제7분(分)수용소에 있는 북한출신포로로써 차로 속히 멸공전선에 참가하며 완전한 자유국민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1952년 8월과 금년 1월의 2차에 걸쳐 본 수용소 소장님에게 본인석방을 앙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한 바 있었는데, 금반 다행하게도 본 수용소에 사무 차로 오셨던 김 중령님을 뵈옵게 되어 각 방면으로 지도를 받는 영광을 얻게 되었는데, 과반 진정서에 기술한 딘 소장 각하에 관한 사항에서 그 후 더 생각나는 점이 있어 하기와 같이 기술하나이다.


  딘 장군은 불행하게도 괴뢰군에게 포로가 되어 북한에서 억류되어 신음하게 되었으나 북한 괴뢰군 당국에서 그를 아무리 회유 협박 학대하여도 끝끝내 국가에 대한 충성과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견지해 내는 것을 주야로 같이 있으면서 목격한 나로서는 참으로 이에 감격하였으며 공산주의에 대한 반발심을 고무 격려 받았고, 이와 같은 자유세계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용장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정신을 볼 수 있은 것은 나의 일생의 큰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그를 구출하지 못한 당시의 환경과 나의 비겁함을 크게 유감으로 생각한다.


  딘 장군을 평양에 감금한 이후의 괴뢰 당국의 의도는 그를 물질적으로 잘 대우하면서 힘것(힘껏)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란봉 밑에 있는 좋은 이층 양옥집을 딘 장군을 위하여 준비하여 놓고 침대, 의자, 쏘파 등 비교적 좋은 가구를 갖다 놓았다.

  9월 1일 새벽에 장군이 그 집으로 호송되었을 때 장군은 녹색 미군 작업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다음 날 미리 준비해 놓았던 새로운 미군 카키군복으로 갈아 입혔다. 장군은 몸이 퍽 쇠약해서 바지를 갈아입을 때에 한 다리로 잘 서지를 못하고 비츨거렸으며(비틀거렸으며) 굵은 골격에는 가죽밖에 붙어 있지 않았었다.

  신체에 부상당한 곳은 없었으며 다만 발등에 깝줄이(껍질이) 벗어져 있었는데, 장군은 이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포로되었을 때 인민군 병사가 장군의 군화를 빼았고 그 후에 다른 군화를 주었는데 그것이 너무 작아서 걷는데 발이 앞았으며(아팠으며), 살이 벗어졌다고 하였다. 그 후 그 상처는 한참 오래가도록 잘 낫지를 않고 고름이 곪기고 있었다. 평양서는 조선 고무신 한 커리를 급여되었는데(한 켤레를 지급하였는데) 그것도 장군의 큰 발에는 너무 작았으나 변소 왕래할 때에 그대로 끌고 다녔다.


  며칠이 지나 차차 친근해짐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담화를 하는 중에 "독서를 좋아하시는가?" 하고 물었드니, "독서는 좋아하는데 안경이 있었으면 좋겠다. 안경이 없어도 독서에 과히 지장은 없으나 안경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하였다.

  그 후 수차 심문관들에게 이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그들은 다만 "해준다."고 말만 하고 종내 안경은 맟우지(맞추지) 못하였다. 나는 한 심문관에게 허가를 얻어서 책을 두 권 빌려드렸다. 둘 다 쏘련의 소설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하나는 <알리떼트 산(山) 으로 가다>라는 것으로, 쏘련 북방의 소수 민족의 생활 풍습을 그린 것으로서 그것을 읽은 후 장군은 다만 재미있었다고 하였다.

  또 하나의 책은 상당히 두꺼운 것으로 <여순(旅順)>이라는 것인데, 일로(日露) 전쟁 시 여순 근방의 전투를 비판적으로 쓴 역사소설이다. 이 소설의 저자는 당시 로군(露軍)의 방위사령관 스텟셀이 조국을 배반하여 일본에 팔아먹은 것으로 규정짓고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딘 장군에게 독후감을 물은 즉, 퍽 감명이 깊은 듯이 한참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일본의 내목(乃木) 대장과 스텟셀과의 에피쏘드를 이야기하고, 내가 중학교 때에 수학여행을 갔을 때에 본 여순 부근의 고전장(古戰場)을 설명하여 드렸던바 장군은 퍽 감흥이 깊었다. 그리고 우리는 현대전의 성격에 대하여 화제를 돌렸다.

  "장군, 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전쟁도 참 신사적으로 하고, 예를 들면 내목 대장과 스텟셀과 같은, 항복한 적병에 대한 의협심 동정심 등의 미담이 많이 있으며, 여순의 203고지에서만 하여도 일로(日露) 양군 사이에서 빵과 술을 교환하여 먹어가면서 싸웠는데, 제1차 대전 이후에는 왜 그런지 전쟁이 잔인무도한 성격만 띠고 모든 국제적 규약과 도덕은 유린되어 아무리 전쟁을 한다 할지라도 인간이 인간다운 성격은 모두 유실하여 버린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 그래, 참 나도 그 말에는 동감이야" 하고 장군은 큰 목소리로 말하였다.

  어쨌던 나는 장군이 그 책을 읽고 나서, 조국을 적국에게 팔아먹은 장군 스텟셀과 그 후의 그에 대한 로서아인의 비난을 딘 장군은 일종의 경고나 격려의 뜻으로 받아드린 것과 같이 그 담화에서 감취하였다. 심사관은 그것이 쏘련 책이라고 하니까 내용도 묻지 않고 그대로 허가했지만, 나는 장군이 그 환경에서 그 책을 읽은 것은 참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하였다. 어떤 날 장군은 변소에 갔다 오던 도중에 앞마당에 서서 따뜻한 해빛(햇빛)과 신선한 공기를 즐겼다. 왼편에 모란봉을 올려다보고 오른편에 대동강의 흐름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그 부근의 환경을 설명하고 강의 이름을 알려드렸던 바, 장군은 "이 강은 항행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이 강은 소형 목선에 의한 수송으로써는 큰 가치가 있지만 기선은 여기까지 못한다(못 들어온다)"고 말씀드리고, 장군이 그 순간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느꼈다.


  내가 장군은 어떤 스포쯔(스포츠)를 좋아하시는가 물었더니, 그는 대개 어떤 운동이나 좋아하지만 특히 권투를 좋아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내가 장군이 어떻게 포로되었는가 물었을 때에도 나타났다. 즉,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7월21일 밤, 대전서 영동으로 후퇴하는 도중에 내 사단은 큰 혼란 상태에 빠졌다. 나는 혼자 부대에서 떠러져서(떨어져서) (어떻게 떠러졌는지 설명하였지만 잊어버렸다) 산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렇게 공격당할 줄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 사단의 좌익이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장군은 이것을 권투에 비교하여 몸짓을 하면서 설명하였다). 그러나 어쨌던 나는 적을 될 수 있는 대로 장시간 방위하려고 애쎴다. 만일 내가 인민군의 지휘관이엇더라면 그보다 훨씬 더 잘 공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지남침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밤에 별을 보고 걷고 낮에는 숨어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흐린 날에는 곤란하였다. 어느 날 밤에는 하로(하루) 밤새도록 같은 곳을 뱅뱅 돈 일도 있었다. 나는 남으로 걷기만 하면 우군의 선에 도달할 자신이 있었는데 나의 잘못은 동남방으로 가야 할 것을 서남방으로 간 것이었다. 이리하여 35일 동안 나는 산에서 날감자, 곡식 등 무엇이나 닥치는 대로 먹고 부락에서 친미적이라고 판단한 집을 찾아 들어가서 식(食)을 구하였으며, 그 동안 6, 7회밖에 정상적인 식사를 얻어먹지 못하였다.

  8월 25일에 역시 친미적이라고 생각되는 집에 찾아 들어가서 음식을 얻으려고 하였으나 어떤 백색 의복을 입은 청년이 나타나서 나의 오른 손을 붙잡고 권총을 빼지 못하게 하였으며, 곳(곧) 여러 명의 부락민과 인민군 병사가 와서 나를 붙잡았다. 바로 전라북도 진안 부근이었다."


  며칠이 안 되여 장군은 단순히 나를 "Lee"라고 부르고, 나는 그를 "General"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당시 무장한 보초의 감시 하에 침식을 같이 하면서 나는 그의 불운한 입장에 동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그도 또한 시내에 가족을 두고 있으면서도 가보지도 못하고 매일 폭격을 받을 때에는 늘 가족 근심을 하는 나의 입장에 항상 동정적인 위안을 하여 주었다. 공습이 있을 때에는 장군에게 지하실로 피신하자고 설복하는 것이 한 수고였다. 장군은 피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겨우 지하실로 모시고 가서는 컴컴하고 습기찬 그곳에서 그는 목제 의자에 앉고 나는 그 옆의 장작떼미 위에 꿀어앉아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다.


  의사가 와서 장군을 진찰하고 약을 드렸으나 수원서 걸렸다고 하는 설사는 멎지 않고 심하여 가기만 했다. 게다가 밥하는 여자가 양식을 차립네 하고 모든 음식을 콩기름 투세기(투성이)로 만드는데 더 곤란했다. 그래서 죽과 소금만을 청했던바 그것도 잘 입에 당기지를 안는(않는) 것 같아서, 감자를 삶아 달라고 하면서 부엌에 내려가서 여자에게 감자 삶는 법을 가르쳐 그 후부터 감자를 몇 개씩과 내 접씨(접시)에 있는 갈치 찐 것을 가치(같이) 나누기도 하였다.

  9월6일 밤에 순안(順安)으로 옮겨갔다. 순안 교외에 있는 카토릭(카톨릭)성당이였다. 본래 외딴 데다가 밤나무 옥수수 등이 성당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외계와는 도모지 절연되어 있었다. 성당을 송판으로 막고 한쪽에 장군이 있고 딴 쪽에는 보초들이 있었다. 나는 장군 있는 쪽에 보초를 사이에다 두고 장군과 서로 반대쪽 벽에 붙어 자게 되었다. 앞마당 끝에 숫대 바주가 있고 그 문 밖에는 성당 직원이 살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초가집이 있어 그곳에서 취사도 하고 매일 같이 교대되는 심문관들도 그 집에서 잤다.

  도착한 이튿날부터 처음으로 심사가 시작되었다. 중성(中星) 네 개의 장교가 위선 인민군과 한국군에 대한 딘 장군의 의견을 물은 다음, 각종 양식의 서류에다 기입을 하고 자세한 자서전을 쓰기를 요구하였다. 그 다음 날에는 정식으로 24사단의 편성과 무기 등을 묻기 시작하였으나 장군은 단지 잘 기억이 나지 않으나 대략 얼마 정도라는 대답을 하고 어떤 질문에는 대답을 거절하며, "제네바 협정에 의하면 포로에게 성명, 계급, 군번호 이외는 묻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우기었다.


  그들은 (1)미군의 극동 군사정책 (2)미군의 조선작전계획 (3)장차 조선서 사용할 계획으로 있는 신무기 (4)일본 방위계획 등 3개의 대제목과 1개의 부차적 제목으로써 되는 군사 정보를 요구하였다. 장군은 간단히 이를 거절하였다. 격노한 심문관과 싸우는 장군의 노력이 매 한 시간 혹은 3, 4시간씩 진행되었다. 심문관은 "미군은 이미 네가 전사하였다고 발표하였으며, 지금 너의 존재는 여기 있는 몇몇 사람밖에 알지 못하니까 우리는 너를 아무 때에나 쥑여 버릴 수가 있다"고 협박하였다.

  실지로 어떤 날 밤에 심사관은 사형장으로 갈 터이니 준비를 하라고 하면서 운전수에게 자동차를 앞 문 앞에다 갖다 대게 하고 보초들을 준비시키고 야단을 하면서 방문까지 열었다가 그만 둔 일도 있었다. 그 동기는 군사정보를 요구하는 것에 앞서서 심사관이 소위 인민공화국과 공산주의의 발전상을 찬양하는 강의를 하면서 '미 제국주의와 트루맨(미 트루먼 대통령)의 침략주의'를 비난하는 성명서를 쓰라고 요구하였다.

  그는 또한 다른 미군 장교들이 방송하였다고 하는 원고도 갖다 보였다. 딘 장군은 "나는 미군의 현역장교로서 미군의 최고사령관인 대통령을 비판할 수 없다. 트루맨 씨뿐만 아니라 그의 어떤 후계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라고 하면서 강경히 거절하였다. 또한 그는 말하기를 "당신들이 그러한 성명서를 어떤 수단으로 쓰게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만일 당신들이 나에게 강제로 공개성명서를 발표하게 한다 할지라도 나의 친구나 나를 아는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을 것이며 또한 강제로 썼다는 것을 알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격노한 심사관은 그와 같은 연극을 꾸민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심사중에 심사관이 "이 자식 혀바닥을 뽑아놓겠다" 하니까, 장군은 "그래 좋다, 내 혀를 뽑으면 방송하라고 강제 받지 않고 좋지!" 하고 코웃음 쳤다. 이 동안의 심사를 한 것은 최라고 하는 총좌(總佐)였다. 심사는 일정한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아침에나 오후에나 혹은 어떤 때에는 밤에도 와서 "그 동안 다시 생각해 보았는가?" 하고 앉아서 수십 분 혹은 수 시간 동안 심문하고 꼭 같은 문답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쥑인다고 위협을 받은 밤에 딘 장군은 8군사령관 워커 장군에게 편지를 썼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본관은 포로가 되었습니다. 우군의 공습으로 말미아마 상당한 수의 비전투원이 살해되고 있으니 비행사들에게 좀더 주의하여 군사 목표를 선정하도록 지시하여 주시오' 하는 요지의 편지였다. 이것을 쓴 이유는 심사관이 미군 공군의 '비인도적인 무차별 공격'을 몹시 저주한 때문이었는데, 또 하나의 이유는 장군이 어떻게 해서든지 미군측과 연락하여 자기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저 하는 노력이기도 하였다.

  이때까지 장군은 미군 포로들에 관한 정보를 얻고저 애쓰고 있었다. 심사관에게 "포로수용소는 몇 개 있는가? 포로의 숫자는 얼마나 되는가? 모 대령이 혹은 모 소령이 포로되었는가?" 등의 질문을 하였으며, "나는 이러한 특별대우도 다 싫으니 미군이 있는 포로수용소로 이동시켜 달라"고 한 일도 있었다. 장군의 완강한 태도에 심사관은 단념하여 한 이틀 동안 심사를 하지 않았다.


  9월16일 밤, 장군과 나는 찦차로 평양으로 갔다. 그날 전란 발생 이래 가장 심한 공습이 있어서 평양 상공은 불바다로 되었으며, 피난민이 길에 가득 차서 교외로 흘러나가고 있었다. 시내에 늘어져 있는 전선과 산란한 물건을 피하여 암흑중을 완행한 찦차는 유명한 정치보위국 안으로 들어갔다. 깜깜한 복도를 통하여 2층 어느 방에 들어가서 좀 기다리고 그 다음 방으로 인도되었다.

  정면에 큰 사무 탁자가 있고 뚱뚱한 체격에 어깨에다 금딱지에 별 두 개를 부친 자가 앉아 있고, 그의 책상에 부쳐서 안락의자가 너덧 개 놓인 응접테불(테이블)이 있고, 그곳에 장군은 앉게 되고 나는 장군과 마주 향하고 앉았다. 멀지감치 떠러져서 회의용으로 큰 테불을 여러 개 부쳐놓은 자리에 총좌급의 장교가 세 명 앉아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착석하고 대성(大星) 두 개짜리가 "이곳은 인민군 총사령부요, 나는 박 중장(中 將)이다"라고 자기소개를 하고 나서 질문을 시작하였다.


"신체의 상태는 어떠한가?"

"과히 좋지 못하다. 설사 때문에 고생중이다."

"치료는 받았는가?"

"네 사람의 의사에게서 치료를 받았다."

"가족의 상태는 어떠한가?"

"처와 아들 하나, 딸 하나 있다."

  이와 같은 문답 끝에 심사자는 단도직입적으로 군사정보를 요구하였다.

  "귀하를 심사한 장교에 의하면 귀하는 요구한 군사정보를 강경히 거절하고 있다 하는데, 그것은 귀하 자신을 위하여 좋지 못하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나에게 그것을 전부 내놓으라. 나는 미군의 잔인한 폭격으로 무참하게 죽은 수많은 남녀노소를 대표하여 그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나는 불행히도 아무런 군사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와 같은 정책은 GHQ나 와싱톤 당국에 속하는 것이지 일개의 사단장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마 GHQ에서도 알지 못할 것이다. 사단장은 병사들의 훈련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오. 나는 그것을 좋아하고 병사들에 접하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동경의 사령부에 있다가 자원적으로 사단장의 자리로 내려간 것이다. 또한 가령 내가 그러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나는 미국의 반역자가 되고 싶지 않고 미국의 청년들을 쥑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누설하지를 않을 것이다."


  격노한 심사관은 책상을 뒤디리고(두드리고) 이러서서(일어서서) 뒤짐을 짓고 이리저리 걸어 다니면서 흥분하였지만, 딘 장군은 태연하게 앉아서 동(動)하지 않았다.

  약 한 시간의 문답 끝에 십분 간의 휴게가 있었다. 대합실로 안내된 딘 장군은 안락의자에 앉자마자 차를 거절하고 그대로 코를 굴고 잠이 들었다. 그것을 본 옆에 있던 자들은 "이런 데서 잠을 잔다."고 놀래었으며, 나도 그러한 긴장한 순간에 태연자약하게 코를 굴고 있는 대담성에 깊이 탄복하였다.

  휴게 후에 다시 박 중장의 실에 들어가서 착석하자, 박 중장은 "답안은 어떠한가?" 하고 물으니 "변함없다"고 대답하였다. 심사관은 "그러면 나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겠다는 서약문을 쓸 수 있겠는가?"라고 물으니, 딘 장군은 그리하겠노라고 펜을 들고 '나는 불행히도 아무런 군사정보도 갖고 있지 않으며, 가령 있다하더라도 미국의 반역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이를 말하지 않겠다는 것을 이에 맹세한다.'고 썼다. 심사관은 "그러면 2일간 여유를 줄 터이니 그 동안 잘 생각해 보고 무슨 말할 것이 있으면 서면으로 나에게 써 보내 달라"고 말하고 심사를 끝마쳤다.


  그날 새벽으로 순안으로 도라간(돌아간) 후 2일간 아무 일도 없이 우리들은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2일이 지난 날 최 총좌가 와서 대답을 쓰라고 하여 딘 장군은 다음과 같이 썼다.


'박 중장 귀하

나는 일전에 말한 바와 같이 다행히도 아무런 군사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가령 있다 할지라도 나의 조국의 반역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그것을 누설하지 않겠다.'


  그 다음 날부터 2명의 소좌와 1명의 중좌와 최 총좌가 와서 교대하여 주야로 심사를 개시하였다. 통역은 나 외에 문정택*이라는 사람을 다리고 와서(데리고 와서) 2명이 교대하게 되었다. (*주: 문정택은 김일성대학원 학생으로 당시 동원된 자임. 9월 30일경의 장군을 희천(熙川)으로 특송 시 문 통역이 수행하였음) 이 심사는 쉴 새 없이 6일간이나 계속되어 통역하는 나도 견딜 수 없을 만큼 피곤하였다. 딘 장군은 목제 의자에 앉아서 그 난경을 극복하였다.

  심사는 주로 딘 장군이 서울서 군정장관으로 있을 때의 '식민지적 정책'을 고발하는 것으로서 심사관은 각각 '남한의 경제문제, 한국군, 남한의 경찰제도, 일반 정치문제 등' 전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미군정은 남조선에서 반역집단을 압잡이로 내세우고 식민지 노예정책을 썼다, 광산과 농업자원을 미국과 일본으로 반출해 갔다, 미국상품의 시장으로 만들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공장을 파괴했다, 일본경찰보다 훨씬 더 잔인한 경찰제도를 수립하여 민주주의적 애국자들을 대량으로 살육했다. 강압적으로 5.10 단선을 감행했다' 등등 일상적으로 북한에서 귀에 못이 백이도록 듣던 것을 '사실과 증거'를 나열하여 이에 대하여 당시의 군정장관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북한에서 토론을 하듯이 한참 내려 엮어놓은 다음 심사관은 "자, 이와 같은 모든 사실을 시인하는가?" 하고 달려드는 것이었다. 안재홍 씨(*주: 안재홍은 1947년에서 1948년까지 미군정 시 민정장관을 역임한 자임)가 서명 날인한 '딘 소장의 악정에 대한 고발문'도 제출하였다. 그때마다 딘 장군은 "흥, 그 사람이 언제부터 그리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되었나?" 하고 비웃거나, "당신은 공산주의자니까 그런 결론을 내린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니까 내 자신의 견해와 토론을 물론 가지고 있다" 등의 말로써 반박하였다. 이 동안의 심사는 무엇을 얻으려는 것보다 딘 장군을 고생시키려는 시도와 같이 보였다.

  하로(하루) 사이에 이십 회나 변소 출입을 하는 극도로 쇠약한 몸으로써 딘 장군은 꼬박 앉아서 이 과격한 심사를 견디어냈을 뿐만 아니라, 아조(아주) 논리적인 답변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그 기적적인 정신력에 놀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6일째 되는 날 아침 3시경에 심사관들은 단념을 하고 딘 장군에게 유서를 쓰라고 하였다. 그는 요지 다음과 같은 편지를 가족에게 썼다.


  '너이들은 내가 전사하였다고 생각하고 있을는지 모르나 나는 죽지 않고 인민군에게 채워서(그는 kicked라는 말을 썼다) 후퇴하다가 포로되었다. 나의 건강 상태로 말미아마 오래 살리라고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너이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다.

  빌(아들의 이름),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라. 항상 성실과 근면과 정직은 인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밀드레드(부인의 이름), 항상 일본에 있을 때와 같이 훌륭한 여성으로 있으라.

  메리(딸의 이름), 너의 모친에게 너무 늦지 않게 손자를 나아주라.

  클라크 중위가 전사하였는지 않았는지 모르겠는데 만일 그가 전사하였으면 그의 부인에게 경제적인 원조를 좀 주도록 하라. 조곰한 아이를 셋이나 다리고 있으니까.

  너이들은 남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가족이었다.'


  장군은 침대에 누어서 곤히 잠이 들었다. 그러나 아침 8시경에 떠드는 소리에 나는 잠을 깨였다. 보초가 의자에 앉아 잠든 틈에 장군은 옆의 보초실에 들어가서 쏘련제 따발총을 하나 들고 자살하려고 하다가 안전장치를 찾지 못하여 금속적인 소리를 내어 자던 보초가 발견하여 총을 빼앗긴 것이었다. 장군은 "나는 어떤 무기의 구조든지 잘 알기 때문에 만일 십오초만 더 있었더라면 자살에 성공하였을 것이다"라고 나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무 흥분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옆에 보초도 서 있었기 때문에 노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군은 왜 어리석은 짓을 하십니까? 장군이 도라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 생각을 해보십시오. 단념하지 말고 최후의 순간까지 살려고 애쓰십시오.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어떤 장래에 장군을 구원할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하여서라도 내가 그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시키려고 하였다.

  근무중에 잠자던 보초는 처벌 받는다고 평양으로 끌려갔다. 그날 아침에 다음 보초는 몹시 화가 나서 장군을 발가벗겨 사루마다만 입히고 방구석에 벽을 향하여 나무 의자에 앉혀 놓은 것을 한 두어 시간만에 최 총좌가 보고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여 다시 침대에 누었다.

  그 후에는 심사관들도 전부 평양으로 돌아가고 또 다시 장군과 나는 한가한 시일을 보냈다. 장군에게 음악만 들려드리라고 갖다 준 일본제의 좋은 단파라지오(라디오)가 있어서 밤중에는 보초와 함께 미국의 욕을 하여 가면서 나는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을 들을 수가 있었다. 때는 인천 상륙 작전을 하는 때였다. 나는 장군에게 "월미도라는 섬을 들은 일이 있는가" 물었더니 "있다. 월미도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고 묻기에, 그 근처에서 전투를 하고 있으며 전선은 가까워오는 것 같다고 말하였다.


  9월 말의 어느 날 밤, 장군을 심사하던 소좌가 한 명 와서 딘 소장에게 이동 준비를 시키라고 하면서 나는 가치(같이) 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한참 있다가 도랑꾸와(트렁크와) 사람을 만재한 3/4톤 추럭(트럭)이 하나 와서 장군에게 타라고 하였다. 나는 장군의 장래와 나 자신의 장래가 우려되어 혼돈된 머리로써 "자살을 한다든가 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고 끝까지 살 길을 구하면서 구원을 기다리시오. 나를 믿으시오" 하였더니 "자네는 왜 가치 안 가는가?" 하고 슲은 낯을 하면서 차에 올랐다.

  암흑 속에 사라지는 차를 한참 보고 서 있다가 방에 들어가 짐을 등에다 지고 "나의 뒤를 따르라"는 소좌의 말에 그 뒤에 따라 걷기 시작하였다. 처음 듣는 희천(熙川)으로 간다고 장군을 실은 차가 떠났기에 희천의 지리적인 위치만을 머리 속에 그려보았다. 사과 밭을 지나서 논길로 들어섰다. 앞길은 아주 캄캄하여 공중에는 별만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소좌는 권총을 빼서 장전을 하면서 "이런 데에 무엇이 있는지 알게 뭐야" 하고 혼자 소리를 하였다. 가을밤이 차서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묵묵히 소좌의 뒤를 따르면서 나의 머리 속에서는 나의 계획이 번개와 같이 점멸하였다.


'도주, 미군, 보고, 구출!'


  그날 아침에 평양 근처에 있는 용성(龍城)이라는 데에 도착하였다. 큼직한 집에 다수의 장교와 병사들이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나는 그날부터 한 무리의 하사관들과 같이 있으면서 아무 일도 맡기어지지 않았다. 어떤 때에는 방공호 파는 데 나가서 삽질 지게질도 하고 며칠 동안은 제봉침(재봉틀)으로 륙구삭구(륙색: 등에 메는 가방)를 16개 만들었다.

  10월 10일에 다행히도 기회가 좋아서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도주하였다. 그리고 평양 시 내외의 여러 곳에 숨어 있다가 유엔군이 입성하자 미군 제24사단을 찾아가서 딘 장군에 관한 사실일체를 보고하고 그의 구출에 협력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나는 장군과 약 1개월간 가치 있었는데 왜 그에게서 분리되었는지 지금도 알 수 없으나, 추측컨대 그들이 나의 사상을 의심한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박 중장이라고 자칭한 방학세(方學世)는 나에게 "강력하게 통역하라"고 말하였다. 최 총좌는 "심사중에 웃지 말고 엄한 얼굴을 하고 있으라."고 하였다. 한 심사관이 문을 나가기도 전에 딘 장군은 "저 놈은 아직도 많이 배워야 하겠군!" 하고 나에게 말하였기 때문에, 둘이서 폭소한 일도 있었다. 물론 보초는 24시간 우리를 보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로써 그들은 나의 태도에 의심을 갖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시간이 적었고 오래 경과되어 기억도 살아져서 순서도 잘 잡히지 않고 난필 난문입니다만, 이상이 딘 소장 각하와 같이 있던 때의 추억을 간단히 쓴 것입니다. 본인이 제 24사단을 찾아간 이후 여러 기관에서 심사를 할 때에 기억도 새롭고 하여서 더 자세히 말씀도 드리고 쓰기도 하고 또한 영사반의 마이크 앞에서 이야기도 하였습니다. 딘 장군이 계시던 집에 가서 사진도 여러 장 찍어 왔습니다.


  딘 장군과 떠러진 이후 저의 단 한 가지의 희망은 장군께서 무사히 귀환하시기를 바라는 것이며 그것만을 주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현재 본인의 심경은 허심탄회하며, 가족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버린 지금에 와서는 하등의 야심도 욕망도 없고 다만 하로 속히 조곰이라도 자유스러운 우리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가치 있는 일을 하다가 공산제국이 멸망하는 날을 보고 싶은 것뿐입니다. 대한민국을 위하여 어떠한 일이라도 할 것이며 아깝지 않은 생명이라도 바치겠다는 것을 재삼 맹세하나이다.

  1953년 4월7일 이규현(李揆現)  63NK-124205


추기(追記):


  딘 소장을 심문한 박 중장은 사실은 정치보위국장 방학세(方學世)였다. 심사 후 2일이 지나서 딘 장군이 문답문을 썼을 때 박 중장 귀하라고 쓴 것을 번역하여 최 총좌에게 주었던 바, 그는 "박 중장이 도대체 누구야?" 하기에, "일전에 딘 소장을 심문한 분이 아닙니까?" 하였더니, 그는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왜 그러는가 물었더니, 그는 "여보, 그게 우리 대장이야. 정치보위국장 방학세 동지야" 하였다.

  이로써 비로소 그날 밤에 방학세는 딘 장군에게 거짓말을 하였으며, 그 자리는 역시 평양 시민이 잘 알고 있던 정치보위국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정치보위국은 정치범만을 취급하는 줄 알았더니 군사적 문제도 취급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또한 내가 어떤 기관에 복무하고 있다는 것을 안 것도 이 날이 처음이었다.


가족 관계


본적 서울시 종로구 제동 79번지

  본적지에서 부친이 평안도로 이주한 것이 약 35년 전이며 실질적으로 본적지와는 관계가 없음.


부친 이석종(李石鍾) 1896년 1월20일생

  6.25 사변 발생 당시의 주소 평양시 신리 203번지

  30여년간 광업회사에 근무하고 해방 후 치약공장 경영과 상업


모친 홍유선(洪有善) 1897년생 무직


자(姉) 이규홍(李揆洪) 1920년생 평양 일본인고녀 출신.  현주소 부친과 같음.

  미장원을 경영하여 아들 2명을 양육하고 있었음. 그의 남편 조춘희(趙春熙)는 반동죄로     아오지 탄갱에서 3년역을 지고 있던 중 사변 발생하였음.


제 이규선(李揆璇) 1927년생  현주소 부친과 같음.

  사변 발생 당시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국가계획위원회에 취직하고 있다가 군대에 동원. 10월 중순에 탈주하여 시내에 숨어 있다가 시가전을 피하기 위하여 시외의 친구의 집으로 간다고 시의 경비망을 뚫고 나갔는데 유엔군이 진주하고 후퇴할 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시의 경비망을 뚫다가 사살된 것으로 추측되어 가정에서는 사망한 것으로 단정하고 있었음.


매(妹) 이경자(李慶子) 1924년생  현주소 부친과 동일.

  평양 서문 고녀 출신. 자(姉)의 미장원 경영에 협력하고 있었음. 그의 남편 박만규(朴滿奎)는 폐결핵으로 부친의 집에서 요양하고 있다가 군대 동원을 피하기 위하여 사변 발생 후 산업성에 취직. 탄광 기사임.


처 우성덕(禹聖德) 1929년생  서울 진명고녀 출신. 무직.


장녀 이영아(李英娥)  1년반 가량 되는 것을 보고 헤여졌음.


차녀 이문아(李文娥)  약 3개월 가량 되는 것을 보고 헤여졌음.


인척   처의 조부모 생존하고 있었음.


처의 부친 우신도(禹信道)  현주소 평양시 선교리  건재상


처의 모친 김확실(金確實)  무직


처남 우원덕(禹元德)  서울 문리과 대학 화학부 재학중

  사변 발생하여 부산으로 후퇴 도중 수원에서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동창생에게서 들었음.


처남 처제가 기타 5명이 있으나 장성하지 못하였음.


기타 친척

  서울에 외사촌 김명년(金命年) 이 있었는 바, 북한에서 듣는 소식에 수산시험장에 있다는 것과 해군에 있다는 말을 들었음. 일정(日政) 시 부산 고등수산학교 출신.

  충남 연기군 전의면 고등리에 이범홍, 이순종, 이긍종,이흥종 등 먼 일가가 있음.

  본인의 조부가 생존 시 본인의 명의로 사준 약간의 토지가 소정리에 있어서 해방 전까지는 매년 약간의 수입을 얻었음.

  처의 백부, 숙부, 고모 2명 등의 가족이 전부 월남하고 있었으나 본인은 그들의 서명조차 알지 못함.     이상


  본인의 친계 가족과 처가는 유엔군의 후퇴 당시 노인과 유아들을 다리고(데리고) 후퇴할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되며, 북한 당국에게 체포되었으면 본인의 가족인 이유로써 생존치 못할 것이며 전부 사망한 것으로 단념함. @K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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