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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1. 직업정신 투철한 사관이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다 기록해서
2. 하도 사관이 쫓아다녀서 못 쫓아오게 멀리까지 사냥을 나갔는데
3. 태종은 아들 양녕대군이 너무 사고를 치고 돌아다니자 속이 상해
(이혜는 사람을 때려 죽이라고 시키기도 하였고 이리 되었다고 한다.)
세종
1. 세종대왕은 좋아하던 후궁에게 신하들 몰래 따로 불러서
2. 친경한다고, 소 끌고 밭 갈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자 배고픔을 못 견뎌, 밭 갈던 소를 때려잡아서 국 끓여 먹은 적도...
3. 명재상 황희는 청백리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었다. 기분 나쁘게 점검하는 바람에
4. 훈민정음 반포식을 축하하는 잔치 행사에는 집현전 학사 절반이 참석하지 못했다. 대부분이 살인적인 과중한 업무와 임금의 요구사항에 시달리다 못 견뎌 병석에 누운 탓이었다.
5. 세종은 부하들을 휘몰아치는데 도가 튼 인물이었다. 밤낮으로 시달리다 못한 김종서는 임금 곁에 있다가는 제명에 못살 것 같아, 스스로 궁궐을 떠나 삭풍이 몰아치는 북방을 개척하겠다고 손을 들고 나섰다. 했으나, 임금은 법령까지 바꿔서 그를 다시 붙잡아다 오히려 일을 더 시켰다.
6. 양녕대군이 평안도를 유람하게 되어 세종은 형인 양녕대군에게 역마에 태워 서울로 올려 보내라"라고 하였다. 양녕은 세종과의 약속도 있고 하여 가는곳 마다 기생의 수청을 물리치고 근신하였으나, 그가 평안북도 정주에 이르렀을 때 그래서 시를 지어 하룻밤 풋사랑을 읊기를 보진 못할것이다. 그런데 바람은 어이해서 신방을 가린 엷은 휘장을 걷어 올리는가" 라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정주수령은 이 기생을 역마에 태워서 서울로 보냈다. 노래로 불러 익혀두라" 하였다.
세종 : 잘 다녀오셨습니까. 제가 신신당부한 말씀을 잘 지켜주셨는지요? 한 번도 여색을 가까이 한 일 없습니다. 덜어 드리고자 가무를 준비하였습니다. 양녕은 기생이 나와 노래하는 것을 보고도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다.
7. 나라에 큰 일이 있어, 모두 고기를 먹지 않는 기간이었다.
문종
1. 수염이 매우 풍성하여 관운장과 같은 풍모였고, 타다 남은 왕의 어진이 한 장 나왔다. 인종의 어진이라고 생각했지만, 문종의 어진이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어진을 조사하다가 보니 어진 구석에 문종대왕의 어진이라는 기록이 있었다.>
2. 학식, 외모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단 하나... 건강
세조
1. 술 먹고 신하의 팔을 꼬집고 신하한테 "너도 나 꼬집어라"라고 시키자 혼내주려다 그냥 넘어갔다. 세조의 팔을 두 손으로 넘겼다. 그래서 세조가 신숙주 죽이려고 했다가, 술 취한 것을 감안하여 넘어갔다.
2. 세조는 후궁이 단 한 명뿐이고 평생 중전인 정희왕후와 금슬이 좋았는데, 국사를 논할 때도, 국가의 모든 행사에도 꼭 정희왕후를 대동했으며
성종
1. 성종은 후추 중개무역으로 돈을 벌기 위해 후추 씨앗을 구하려고 후추가 들어오는 바람에 창고에 후추가 가득히 쌓여, 예쁜 비단 주머니에 담아 조정 관리들에게 하사하였다.
연산군
1. 성종과 연산군이 오랜만에 밖에 바람 쐬러 나와서 성종이 저는 왜 어미가 없습니까"라고 말했다.
2. 또 다른 야사에서는 연산이 동궁이었을 때 어느 날 성종에게 연산은 "구경할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 소를 따라가는데 그 어미 소가 울면 송아지도 따라 우니 그것이 가장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여 성종이 가여워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있다.
3. 공부하는 걸 매우 싫어하여, 왕자를 훈육하는 학자들이 참으로 고생을 했다고 한다. 폐비 윤씨 사건이 일어났을 때 모두 죽여버렸다.
4. 춤을 잘 췄다고 한다.
5. 모후인 폐비 윤씨와 고려 공민왕의 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얼굴이 수집하게 한 일도 있었다.
6. 대단한 꽃미남이었다고 한다.
중종
1. 자식 사랑이 남달라서 공주, 옹주랑 왕자들이 오랜만에
2. 동궁 전에 불이 났을 때 맨발로 달려나와 아들을 (훗날의 인종) 애타게 부르며 울었다고 한다.
3. 효정옹주의 남편(부마)이 바람을 피우고 다니자 옹주가 질투(철거지악)를 하지 않는다고 옹주을 꾸짖은 적도 있었다.. 죽자 직접 부마를 잡아와 친국을 하기도 했다.
인종
1. 인종은 모후인 장경왕후가 자신을 낳고 7일만에 죽자 못살게 굴었다. 하루는 밤에 쥐의 꼬리에 불을 붙이고 인종이 인종이 창문으로 보니 문정왕후가 웃으며 빨리 불이 타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빈궁만 내보내고 자신은 문정왕후에게 효를 행하기 위해 불 속에서 죽으려 했다. 빈궁과 인종이 어쩔 수 없이 불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그때, 밖에서 중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종은 지금 죽는 것은 문정왕후에게는 효가 되지만 중종에게는 불효가 된다고 판단하고 곧바로 나왔다.. 그러나 불을 지른 범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명종
1. 다른 사람들은 다 물러가 있거라 하고 노래 잘 부르는 내관에게 2. 꾀병 부려서 총애하는 내관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3. 노래도 잘 부르고, 간호 잘하는 내관은 같은 남자이다.
4. 내시와 있는 시간이 좋았던 명종은 몸이 아프다고 꾀병을 부려
선조
1. 임진왜란 당하여 의주까지 몽진을 갔다가, 어느 백성이 올린 수라상을 받았다. 그 수라상에 올라있는 생선이 참 맛이 있어서 인조가 생선의 이름을 묻자, 백성은 '묵'이라 대답하였다.
광해군
1. 선조가 세자를 세우기 위해 여러 왕자에게 "반찬을 만들려면 무엇이 제일 필요하냐?" 라는 질문을 하자 광해군이 "소금이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가장 애통하옵니다."라고 답하였다.
효종
1. 나르시즘에 빠져, 항상 거울을 볼 땐 스스로 만족에 차
2. 후궁을 들이지 아니하였다.
숙종
1. 신하들이 따뜻한 온돌방에서 꾸벅꾸벅 졸자 온돌을 빼버리고
인조
1. 자신의 몸과 봉림대군의 몸이 아프자, 소현세자의 아내가 저주를 하여 그러한 것이라고 사약을 내려 그 가족들을 모두 죽였다. 소현세자를 죽일 때 11살과 6살이던 아들들도 다 죽이고 임신했던 세자빈까지 죽였다.
영조
1. 연애소설을 좋아하여 가끔 자신의 글에서도 소설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뜻으로 금주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2. 영조의 어진에 나와있는 쌍꺼풀지고 길쭉한 눈과 오뚝한 코에 조그마한 입술은
3. 영조가 연잉군이었던 시절 달성 서씨 집안의 규수(정성왕후)를 아내로 맞이하여 첫날밤을 치를 때의 일이다. 칭찬을 하자, 그 부인이 무심코 "궂은 일을 해본 적이 없어 그렇다" 고 했더니 영조가 그날로 부인을 소박하였다. 아마, 무수리로 고생했던 어머니의 거친 손과 발을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4.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간택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쓰인 방석에 앉지 않자, 그 이유를 물으니 "자식이 어찌 아버지의 존함이 쓰인 방석을 깔고 앉겠습니까." 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보릿고개라! 겨울 양식이 봄이 되자 다 떨어지고 그 얼마나 난감한가. 이것이 보릿고개인데 김규수가 넘기 힘든 고개가 바로 보릿고개라 하니 얼마나 명답인가!
다음으로 꽃 중에 제일인 꽃을 묻자, 이유를 물으니, "목화 꽃이 다른 꽃들보다 화려하지도 예쁘지도 않지만, 핀 연후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면에서는 다른 꽃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유익한 꽃이니, 바로 목화가 백성의 옷감이 되어서 예절도 지키고 품격도 살리고 추울 때 보호하여 주기 때문입니다." 라고 답하였다.
정조
1. 정조가 말하길, "매양 취침하기 전에 두 발바닥의 가운데를 마주 문질러 비비면 기운이 절로 퍼진다. 내가 밤마다 시험해 보았는데, 처음에는 힘이 드는 듯 했으나 오래도록 계속 했더니 신통한 효험이 있다."
2. 연애소설을 비롯한 소설을 무척 싫어하여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서고에 있던 모든 소설을 불태웠다. 또한 숙직을 하던 집현전 학자들이 몰래 연애소설을 읽다가 정조에게 들켜서 혼이 나고 삭탈관직 당했다. 쓰고 나서야 다시 벼슬길에 나올 수 있었다.
3. 영조는 근검하여 백성이 먹을 쌀이 없어진다는 이유로 금주령을 내렸지만 정조는 개인적으로 술을 좋아해서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금주령을 없앴다.
4. 공부 못하는 신하한테 공부하라고 끈임없이 독려하고, 기절할 때까지 마시게 하고, 시켰다고 한다.
5. 술을 무진장 좋아하여, 정약용에게 필통에 한가득 부어 원샷! 하기를 강요하였다. 정약용은 술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 때의 필통에 술 붓기라면, 요즘 사발에 소주를 들이붓는 거와 맞먹는다고 한다.
6. 정조 임금이 정약용에게 높은 벼슬을 주려고 시험을 열었는데
헌종
1. 헌종은 대단한 미남이었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여색을 즐기는 왕 때문에 궁궐 내 용모가 예쁘다고 하는 궁녀들은 거의 승은을 입었다고 한다. (하여 후궁첩지도 쉽게 내리지 못했음. 왕이 아주 미남이라 오히려 젊은 궁인들이 왕을 유혹했다. 죽기 직전에는 피가래까지 토하며 고생하다가 2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다.
2. 헌종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으므로 늘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가워 한 신하에게 물었는데, 전하의 용안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니
고종
1. 고종황제가 행차하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보고 "어찌 저런 일을 하인들에게 시키지 않고 귀빈들이 하느냐" 고 안타까워 했다.
2. 명성황후가 죽고 나서 끝까지 재혼을 하지 않았지만 아끼던 곁에 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훗날 사람들이 말하길 그 상궁은 명성황후와 매우 닮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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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랑-이생강(대금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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