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카(Francesca) 여사가 6.25 기간 중에쓴 영문일기 건국초기 환국한 이승만박사의 부인으로 함께 귀국할때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파란눈의 서구여성 프란체스카의 한복차림이 너무 신기했든 그때가... 하와이 망명생활후 홀로 다시 남편의나라로 돌아온 프란체스카여사 그가 펼처낸 6.25 한국전쟁이 터진 그날의 긴박한 대통령의 하루 하루의 기록입니다. 조금 길긴하지만 읽어 볼 만한 가치가 있어서 옮겨 드립니다. 자료주신분 감사합니다.
올해는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1년을 맞는다. 이 책의 원본은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Francesca Donner Rhee) 여사가 6.25 기간 중에 쓴 영문일기이다. 영문일기는 비망록(Confidential Notes) 또는 프란체스카 일기(Mrs Rhee Diary)로 통용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비망록은 ‘대통령의 경무대 일지’나 다름없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전시통치사료(戰時統治史料)’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마치 이승만 대통령의 입의 혀처럼 일처리를 잘해 나갔다. 전시 이승만 대통령의 영문 일기체 형식의 6.25전쟁 비망록은 프란체스카 여사에 의해 휴전이후 50년 뒤인 1983년 지상에 뒤늦게 공개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이승만 대통령이 서거한지 약 18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탱크를 막을 길이 없을 텐데..." 6월25일 북한 공산군은 6월 25일 새벽 5시에 쳐들어왔다. (*국방부 전사에는 새벽 4시로 기록, 당시 언론에 보도된 내용에 의해 5시로 기록한 것으로 판단)
전속부관이 전화를 받았다. 그는 장군을 깨울 수 없으니 나중에 걸겠다고 대답했다. 대통령은 벌컥 화를 내며 “한국에 있는 미국시민이 한 사람씩 죽어갈 터이니 장군을 잘 재우시오.”라고 고함쳤다. 나는 너무나 놀라 수화기를 가로막았다. 대통령은 “마미, 우리 국민이 맨손으로 죽어 가는데 사령관을 안 깨우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요!”라며 몸을 떨었다. 맥아더 사령관과의 통화가 끝나자 워싱턴의 장면(張勉) 대사를 불렀다. “장 대사! 트루먼 대통령을 즉시 만나 이렇게 전하시오. 적은 우리 문전에 와 있다고. 미 의회가 승인하고 트루먼 대통령이 결재한 2천만 달러 무기지원은 어떻게 된 것이오?” 대통령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계속 떨고 있었다. 를 막을 수가 있나?” 대통령은 안절부절못하고 뒷짐을 진 채 방안을 맴돌았다. "안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
6월27일 숨 막힐 듯한 긴장과 긴박감 속에 하루가 지났다. 대통령이나 나나 자정을 넘겨 막 잠자리에서 눈을 붙였을 때 비서의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맡의 시계는 27일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신성모 국방장관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이어 서울시장 이기붕(李起鵬) 씨와 조병옥(趙炳玉) 씨가 들어왔다. “각하, 서울을 떠나셔야겠습니다.” 신 장관이 간곡히 남하를 권유했다.“안 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 대통령은 그 이상 아무 말도 않고 문을 쾅 닫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대전 사수해, 난 여기서 죽겠다" 유서 남겨 7월1일 오전3시 대전의 어둠은 아직 걷히지 않았다. 황규면 비서가 대통령을 깨웠다. 공산군 탱크가 이미 수원을 지나 빠른 속도로 남진하고 있다는 긴급 보고였다. 보고를 받고 난지 20분쯤 뒤, 미 대사관 1등서기관 해럴드 노블이 관저로 달려와 대전 이남으로 옮겨야 된다고 대통령을 설득했다. 신 국방장관과 정일권 장군도 이내 도착했다. 하나같이 침통한 표정들이었다. 대통령은 차라리 대전에서 죽는 게 낫지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가 경멸을 당하지는 않겠다며 대전 사수를 고집했다. 침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대통령은 책상 위에 두 손을 올리고 기도하는 자세였다. 그의 얼굴은 불행한 국민들에 대한 연민의 정과, 잇단 패전에 대한 분노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당장 상황을 뒤바꿀 어떤 대책이 있을 수도 없었다. 대통령은 노트를 꺼내 내게 건네주며 메모를 부탁했다. 나는 조용히 그가 부르는 대로 받아 적었다.
지사 관저서 피난살이, 70명 대식구 끼니 걱정 7월22일 피난생활도 어느덧 한 달이 다가온다. 이곳 대구에서 누구보다 고생하는 사람은 조 지사부인이다. 대통령 부부를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부인의 신세를 지고 있다. 대통령 임시관저에는 항상 70여 명의 고정된 식구가 북적거렸다. 이 모두가 조 지사 부인의 일거리다. 우리 부부, 각료, 국회의원 비서관, 경호경찰, 수시로 드나드는 군 장성, 미 대사관 직원들, 그리고 가족들과 헤어져 이곳에 내려온 정부관리들 모두가 조 지사 관저의 식객들이었다. 부인은 가정부 2명을 데리고 임시 경무대의 살림을 꾸려나갔다. 밥 짓는 일에서 빨래까지 그만한 중노동도 없었다. 피난길엔 너나없이 단벌신사들이었다. 장관이고 국회의원이고 고위관리고 간에, 양복이나 와이셔츠를 아끼려고 지사관저에 들어오면 팬츠만 입고 웃옷은 옷걸이에 모셔놓았다.
어렵게 구한 땀띠약, 대통령이 몽땅 군인들에게 대통령과 나는 온몸에 땀띠를 뒤집어썼다. 대통령의 잔등은 모기에 물린 곳까지 겹쳐 보기에 딱할 정도였다. 워낙 물이 부족하여 밤이면 물 한 대야를 떠다가 수건에 적셔 대통령의 땀을 닦았지만 땀띠는 점점 심해져 진물까지 흘렀다. 나는 워커 장군에게 땀띠연고를 구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았다. 무초 대사나 워커 장군, 그리고 우리 집에 드나드는 미국인들은 나를 보면 “마담 리, 도와드릴 일이 없습니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라도 알려주세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렇지만 대통령은 그들에게 사사로운 부탁은 일체 못하도록 나에게까지 엄명을 내리고 있었다. 나는 참다못해 워커 장군에게 땀띠약을 부탁한 것이다. 장군은 땀띠연고 외에도 다른 상비약과 영양제를 한 박스 보내왔다. 그런데 내가 부엌일을 보러 잠시 들어간 사이에 약상자가 대통령의 눈에 띄고 말았다. 대통령은 나에겐 한마디 의논도 없이 아침보고를 하러 들어온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일선의 우리 아이들에게 갖다 주라”며 약상자를 맡겨버렸다. 약상자뿐만 아니라 친정에서 보내온 비타민까지 몽땅 합쳐 주어버린 것이다. 내가 부엌에서 나올 때 신 장관이 막 약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가려는 참이었다. 내 의사를 물어볼 분이 아니었다.
"제주도에 망명정부를..." 美대사 말에 권총 꺼내 "이 총으로 적을 죽이고 처를 쏘고 나를 쏘겠소" 무초 대사는 대구가 적의 공격권에 들어가자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그의 주장은 그곳이 적의 공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고, 최악의 경우 남한 전체가 공산군에 점령된다 해도 망명정부를 지속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대통령 닮은 양씨 내리자 군악대 연주 8월 20일 오후 7시, 우리는 헤스 소령, 노블 참사관, 김 장군, 김 대위 등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6월말 경무대를 떠나온 뒤 처음으로 나는 우리 집 부엌 같은 기분이 드는 진해별장 부엌에서 저녁식사를 마련했다. 전처럼 양념이 고루 갖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양파, 풋고추, 감자를 듬뿍 넣고 그럴듯하게 닭찜을 흉내 내고, 상치로 겉절이를 만들어 식탁을 차렸다. 오랜만에 요리를 만들 기회를 맞은 양 노인도 신이 났다. 대통령이 양 노인을 데리고 다니는 데는 꼭 요리를 만들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두 노인네 사이에 사연이 있어서였다. 지게에 지고와 두고 가기도 했다. 대통령은 이런 음식이 생기면 몽땅 전방이나 후방 훈련소의 우리 아이들에게 갖다 주도록 했다. 날씨가 더워 고기나 빵 같은 것은 하루만 지나면 상하는 시절이었다. 대통령이 양 씨를 불렀다. “자네 나하고 같이 부산 훈련소에 다녀오지. 저 음식들을 갖고 가서 자네 솜씨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우리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게. 음식이 빨리 상하니 비행기로 가지.” 부산 신병훈련소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와서 특식을 제공한다는 연락을 받고 군악대까지 대기시켰다. 비행기 문이 열리고 양 씨가 음식을 먼저 챙기기 위해 트랩을 내려섰다. 군악대가 대통령 환영 연주를 시작했다. 언뜻 보아 양 씨는 틀림없는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문서를 손수 타이핑하는 이승만(미국 망명생활때부터 사용) 미군과 함께 상륙작전...목표는 목포 9월12일 아침에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이 대통령에게 작별인사를 하러왔다. 3천 해병을 이끌고 정오에 배로 떠난다고 했다. 울산 쪽 동해안에 12척의 큰 함정들이 대기 중이라는 것이다. 한 달 쯤 전 대구에서 일본으로 훈련 차 떠났던 8천 명의 한국군 장병들도 이번에 돌아와 미군과 함께 상륙작전을 벌이러 간다고 한다. 상륙지점은 목포라는 말도 있다. 저녁 무렵 대구에서 국방장관이 와 대통령에게 청도에 있는 피난민촌을 방문하도록 권했다. 대구와 부산 사이 중간쯤에 있는데 기차를 타고 3시간, 다시 지프로 45분 걸리는 곳이다. 신장관은 또 총공격이 계획됐으나 일본을 덮친 태풍 때문에 연기해야 될듯하다고 보고했다. 밤새 바람이 미친 듯 불어댔다. 도대체 어찌될 것인가. 바람 불거나 비 오는 날이면 공군기들이 적을 공격할 수가 없다.
날씨가 또 궂다. 가신 줄 알았던 태풍이 다시 횡포를 부린다. 어제 하오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에 성공했다고 한다. 우리가 생각하기엔 좀 이상하지만, 그게 미 육군과 해군이 이곳에서 작전하는 방식이다. 9월22일 노블 참사관이 아침 일찍 와서 서울시장과 인천시장이 환도 선발대로 김포로 떠난다고 알려줬다. 또 맥아더 장군이 어제 도쿄로 돌아갔다는 방송보도도 전했다. 그렇다면 토요일이나 일요일 이전에는 서울에 갈 수 없다는 뜻이다. 점심은 윌리엄 박사와 신성모 국방이 함께했다. 윌리엄 박사는 도지사 집에서 기거하지만 식사는 우리에게 와서 한다. 도지사는 지난 20일 윌리엄 박사를 환영하는 시민대회를 열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박사는 흐뭇해했다. 이 대회에서 대통령은 한 시간도 넘게 연설을 했다. 대통령은 신 국방장관에게 서울 중앙청만은 꼭 우리 국군이 먼저 탈환하여 태극기를 꽂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어제 대통령은 중앙청 출입기자단과 사변 이후 처음 회견을 가졌다. 서울탈환을 앞둔 소감을 대통령에게 질문했다. 대통령이 다음과 같은 요지로 답변했다. “처음에는 무기가 없어 곤란을 당했으나 이제 서울탈환을 목전에 두게 되니 감개무량하다. 언제나 민주진영은 끝에 가서 승리한다. 그동안 동포들이 화를 당하고, 더욱이 날씨가 추워짐에 따라 전재민의 어려운 상황을 생각하니 가슴 아프다. 하루바삐 서울을 탈환하고 정부가 들어가면 앞으로 더욱 우리가 할 일이 많다.
나는 뒤에 타고 있는 황 비서에게 맥아더 장군에게 수여할 훈장과 훈기를 확인시켰다. 김포비행장에 도착하니 많은 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우리가 탈 차는 맥아더 장군이 마련해준 카키색 세단이라고 노블 박사가 가르쳐 주었다. 눈에 익은 몇몇 특파원과 기자들이 대통령의 서울 복귀를 취재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 곁에는 워커 장군, 아몬드 장군, 조이 장군 등이 서있었다. 대통령은 비행기트랩을 내린 다음 맥아더 장군과 악수를 나누며 감격적 으로 껴안았다. 그 순간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목이 메어 대통령 뒤에 가만히 서있었다. 이어 맥아더 장군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서 나에게 자기 부인의 안부 인사를 전했다. 맥아더 장군의 부인은 아주 매력 있는 주부이고, 남편의 지위 때문에 티를 내는 일이 없는 겸손한 아내였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금방 친숙해졌고 서로 마음이 잘 통했다. 전승국 최고사령관의 부인으로서 늘 검소했으며 사치나 낭비를 죄악으로 생각하는 절제 있고 조용한 내조자였다.
대통령은 나에게 한 줄이라도 좋으니 날마다 간단하게 기록하라고 당부했다. 어제는 김광섭 비서가 연락도 없이 늦게 왔다. 대통령은 그에게 시킬 일이 많이 있어서 아침부터 김 비서를 기다렸다. 대통령은 시간을 잘 지켜야만 문화인이라고 누구에게나 가르쳐 왔으며, 시간을 안 지키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김 비서는 시인이기 때문에 문인기질이 있어서 자유분방한 면이 있지만, 나와는 달리 대통령은 항상 그를 감싸준다. 김 비서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남의 잘못을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너그럽지 못한 성미 탓에 나는 부석해진 김 비서의 얼굴과 술 냄새로 “또 술 마시고 늦었구나”하고 바로 직감했다. 대통령도 기분이 좋지 않은 음성으로 늦게 온 이유를 김 비서에게 물어보았다. 김 비서는 납북됐거나 죽은 줄로만 알았던 친구들을 만나 밤새껏 막걸리를 마셨다고 실토했다. 이 말에 화가 풀린 대통령은 “절친한 친구들이 안 끌려가고 용케도 살아남아 있었으니 반가웠겠구먼. 그래 별다른 소식들은 없었나?”하고 물었다.
오늘은 온통 축제분위기다. 엊저녁부터 계속 타이프를 쳤더니 손끝이 화끈거린다. 저녁에는 무초 대사 축하만찬과 함께 평양입성 축하까지 겹쳐 기쁨에 넘치는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대통령도 시종 무초대사와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만 워커 장군이 샐러리와 당근 곁에 있는 조그만 유리그릇에 담아놓은 초고추장을 야채와 함께 찍어먹고 매워서 어쩔 줄을 모르는 모습을 보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마요네즈 소스를 곁들여 놓았는데도 대통령과 무초 대사가 찍어먹는 것을 보고 워커 장군도 토마토케첩으로 알고 먹었는지 저토록 혼나는 모양이다.
대통령은 이날 오전 7시 반 경무대를 출발하여 8시35분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 평양으로 향했다. 신성모 국방장관, 김광섭 비서, 김장흥 총경, 이선근 대령 등이 수행했으며, 공군의 김정렬(金貞烈) 장군이 경호비행을 했다. 동행하지 못한 나는 대통령이 돌아올 때까지 마음을 죄며 기다렸다. 바로 열흘 전까지 평양은 우리의 적인 공산당들의 아성이었기 때문에 나는 대통령의 안위가 몹시 염려되었다. 태극기를 든 평양시민들이 만세를 부르며 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했다고 한다. 연설을 마친 대통령이 군중 속으로 들어가서 수많은 시민들과 악수하며 껴안고 등을 두드리는 바람에 수행했던 사람들과 정일권 장군이 무척 애쓰고 혼이 난 모양이었다.
트루먼에게 원자탄 사용 검토...영국 수상이 반대 11월28일 맥아더 장군이 워싱턴에 전문을 보냈다. 「본 사령부는 능력범위 내에서 인간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을 다하였으나 지금은 그 통제와 힘이 미치지 못하는 사태에 직면해 있음.」트루먼 대통령은 국가안보회의 특별회합을 소집했다. 이 회합에서 애치슨 장관은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어떤 다른 방법을 찾아야할 것” 이라고 자기의 견해를 밝혔다. 트루먼 대통령은 11월 30일 기자단과의 주례회견 석상에서 “필요한 단계에는 중공군에 원자폭탄을 사용하기 위한 모든 적극적인 고려를 하도록 명하였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서 3차 세계대전은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난로 불도 없는 성탄 예배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신다" 12월24일 내일이 크리스마스여서 우리는 예배를 보러 오전 11시 정동교회로 갔다. 성탄절을 맞는 예배당 안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이 너무나 쓸쓸하고 황량하며 난롯불 하나 없이 썰렁했다. 손발이 꽁꽁 얼어 감각이 없어질 만큼 추운 이 넓은 예배당 안에는 손으로 꼽아 약 20명의 교인이 모여 있었다. 목회를 인도할 목사가 없어서 평신도 한사람이 예배순서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 신도의 설교는 매우 감동적이었다. 교인들이나 대통령은 함께 예배를 보게 되어 모두 기뻐하였다. 그 신도는 성경의 마태복음 10장 29절을 봉독했는데, 사람들이 모두 울었다. 대통령은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니 아무리 강한 적이 쳐들어와도 기어이 물리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도록 격려했다. 이 예배는 지금껏 우리가 참석해온 예배 중 가장 감명 깊게 기억에 새겨질 만큼 감동적이었다.
"평양의 식량 태우지 마라, 시민에게 나눠주라" 1월3일 오전 9시에 서울비행장 활주로를 이륙할 비행기를 타려면 8시30분에 경무대를 출발해야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시간을 지연시키려고 괜히 이 일 저 일을 하려고 했다. 나는 슬픈 감정을 억제하며 눈물을 감추느라 애쓰면서 비통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대통령과 나는 경무대를 떠났다. 우리는 한사람의 비서(황규면 씨)와 양 노인과 고용원 여자 한사람을 데리고 떠났다. 그 이외의 직원들은 이미 각자가 가족들을 데리고 기차나 배로 떠나도록 했었다. 그들 대부분은 벌써 1주일 전에 정부의 모든 공무원들이 가족들과 함께 철수할 때 떠나가도록 조치를 했었다. 평양에서 철수할 때 군대에서 수송해오기 힘든 양식을 소각했다는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이기붕 서울시장에게 모든 쌀과 양식을 한 톨도 태워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 대신 양식을 전부 피난하지 못하고 남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남김없이 나누어주도록 지시했다.
대통령이 의장대를 사열했다. 사열식이 끝난 다음 스트러블 제독은 우리를 식당으로 안내하였다. 식당은 칸막이는 없었는데, 두 군데로 나누어져 있었다. 식탁은 2개가 마련되어 있었다.
지평리의 처절한 싸움터에서 공산군들은 마침내 후퇴하기 시작했다고 맥아더 사령부에서 알려왔다. 맥아더 장군은 대통령에게 만주에 대규모 폭격을 가해 북한 북쪽에 있는 적의 후방기지를 섬멸하여 다시는 공산도배들이 힘을 못 쓰게 만들겠다고 장담했다. 대통령은 “국가를 통일하고 우리의 영토를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완전히 회복하여, 한반도 안 어디나 분단된 곳이 없도록 한다.”는 전쟁목표를 뚜렷이 밝힌 각서를 장면 국무총리에게 주었다. 그리고 이 각서를 워싱턴의 우리 대사관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사본을 만들게 해 자신이 급히 쓴 편지와 함께 외교행낭 편으로 보냈다. 이 서한에서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완전통일 이외에는 어떤 것도 수락할 수 없다는 입장을 천명하였다.
프란체스카 도너 리 著 / 조혜자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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