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

四君子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멋이었다

덕여 (悳汝) 2011. 5. 14. 18:10

 

四君子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멋이었다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사군자(四君子)라 한다.
이 네 가지 식물은 어려운 여건을 이겨내고 싱싱하게 자라
꽃을 피우고 자신을 보존함이 마치 인품과 학식을
겸비한 군자의 모습을 닮았다 하여 부쳐진 이름이다.

 

사군자는 일찍이 동양 시 서화의 주요 소재로서

충성 절개 지조 은일(隱逸)과 같이 유교에서
숭상하는 도덕적 가치를 상징하는 존재다.
우리도 고려 때부터 시와 그림의 소재로 애용하였고
조선에서도 문인화가들이 사군자를 다루었으며
특히 사군자에 능통하여 이름을 날린 화가도 많다.

살펴보면 조선 제일의 묵죽 화가로 알려진 탄은(灘隱)
이정(李霆) 이정을 계승한 수운(岫雲)유덕장(柳德章)
난치기와 서예에 능통했던 강조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매화 그림의 대가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
난초 그림의 쌍벽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등이다.

 

이들의 작품을 한점 한점 감상해 보자.


 

매조(梅鳥)
(), 창강 조속(滄江 趙涑, 1595
1668)

조속은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평생 학문에만 정진하여 세간에서 지조 있는 선비로 존경 받았던

인물이다. 아울러 시·서·화에 능했으며 특히 묵매(墨梅)
화조화를 잘 그려 이름을 날린 문인화가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조속의 솜씨로 전해지는데, 매화가지가
왼쪽으로
치우쳐 뻗어 나간 것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조형적
긴장감이 느껴지며 먹 선도 맑고 깔끔하다. 매화가지 끝을

뚝 부러진 것처럼 묘사하고 꽃보다는 가지의 꺾임을 강조하여
그린 것은 조선 중기 묵매도의 전통을 반영하는 것이다.




 

 

 

홍매 대련(紅梅 對聯)

우봉 조희룡(又峰 趙熙龍, 17891866)

조희룡의 대표작으로, 지그재그로 구부러진 굵은 매화 줄기의

일부를 클로즈업하여 화면의 세로 방향에 따라 배치하는 대담

한 구성이 돋보인다. 무수히 핀 붉은 매화 송이 외에도 줄기
곳곳에 많은 태점을 찍어 다소 번잡한 느낌을 주는데 이렇게
꽃이 많고 구도가 복잡한 것은 중국 청대(淸代) 매화도의
영향 때문으로 짐작되지만 확실치는 않다.
화면 내에 조희룡의 관지는 없지만 근대 서화가이자
대 수장가였던 김용진(金容鎭 18781968) 1947년에 쓴
후제(後題)에서 조희룡의 그림임을 밝히고 있다.

 

 

 

 

 

 

 

 

 

 

 

 

 

 


묵란(墨蘭)

옥산 이우(玉山 李瑀, 15421609)


이우는 신사임당(申師任堂)의 넷째 아들이자 율곡 이이(李珥)
동생이다. 시·서·화·금()을 다 잘하여 사절(四絶)이라
불렸으며 그림은 어머니의 화풍을 따라 초충(草蟲) 사군자
포도 등을 그렸다. 농담의 변화가 능숙한 필치로 유려하게 그린
난초는 이파리가 방향을 바꿔 꺾이지 않고 길게 뻗어나갔다.
이러한 난법은 중국 원()·명대(明代)의 전통을 따른 것으로
조선중기 묵란도는 대부분 이러한 방식으로 그려졌다.

조선 중기의 묵란도로서 회화사적 의의가 큰 작품이다.

 

 

 

 

 

 

 

 

 

 

향란독무(香蘭獨茂)

추사 김정희(秋史金正喜, 17861856)

 

향기로운 난초가 홀로 무성하게 피어 있음을 탄식한

공자의 이야기 가운데 충신(忠臣)에 비유된 난초를
주제로 하여 그린 상징성 강한 작품이다.
김정희는 난초를 치는 것이 가장 어려운데 그것은
인품이 고고(高古)하여 특별히 뛰어나지 않으면 쉽게
손댈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김정희 스스로도
배우려고 열심히 노력했으나 남김없이 할 마음을
잃어버려서 그리지 않은 것이 이미 이십여 년이나
되었으며 사람들이 요구하지만 일체 못하는 것으로
사절하였다고 말한 바 있듯이 그의 묵란도는
얼마 되지 않지만 모두 고담한 운치가 느껴진다.

 

노근묵란(露根墨蘭)

운미 민영익(芸楣閔泳翊, 18601914)

 

민영익의 난 그림은 당시 유행하던 대원군의 석파난(石坡蘭)

스타일과는 달리 짙은 먹을 써서 난 잎의 끝을 뭉툭하게 뽑아

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은 ‘노근란’이라 하여
뿌리가 드러난 난초를 그렸는데, 이것은 나라를 잃으면 난을
그리되 뿌리가 묻혀 있어야 할 땅은 그리지 않는다는 중국
남송말(南宋末) 유민화가(遺民畵家) 정사초(鄭思肖)
고사(故事)에서 따온 것으로 당시 나라를 잃은 민영익의
심경이 그대로 토로되어 있다. 화면 곳곳에 안중식(安中植)
오세창(吳世昌) 최린(崔麟 18781950), 이도영(李道榮)
그림 감상 후에 쓴 글이 빽빽하게 적혀 있다.

 

 

 

괴석난초(怪石蘭草)

석파 이하응(石坡李昰應, 18201898)

 

임금의 아버지를 이르는 칭호인 대원군(大院君)으로 더 잘
알려진 이하응은 여기(餘技)로 즐긴 서화에도 뛰어났다.

특히 함초롬이 피어난 춘란(春蘭)을 그린 그의 난초그림은

석파난(石坡蘭)으로 불렸으며 추사 김정희도 인정했듯이

당대의 으뜸으로 꼽혔다. 이 작품은 대원군이 임오군란
(
壬午軍亂)의 실패로 재집권의 기회를 놓치고 청나라에

잡혀 갔다가 4년만에 귀국하여 운현궁에 칩거했던 1887
곡우(穀雨)날에 그린 만년작이다. 날카롭기는 하나 초기작에

비해 굵기의 변화가 줄어들어 한층 부드러워진 난잎이
담묵(淡墨)의 꽃잎과 어울려 자연스럽게 너울거린다.

 

 

 

국화와 잠자리

현재 심사정(玄齋沈師正, 17071769)


사군자 가운데 가장 늦게 유행한 국화는 18세기가 되어서야
널리 그려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남종화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심사정의 묵국도(墨菊圖)
가장 이른 예이며 심사정이 그린 사군자 그림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국화이기도 하다.

심사정은 당대부터 산수보다는 화훼(花卉)와 초충(草蟲)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는데, 이 작품 역시 자신의
장기를 살려 밝고 부드러운 화훼초충도의 분위기를 냈다.
국화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황국(黃菊)과 함께
구기자와 잠자리를 화사한 담채로 그렸다.

 

기석경절(奇石勁節)
운미 민영익(芸楣 閔泳翊, 18601914)

 

민영익은 1905년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 이후 중국 상해로
영구 망명하여 서화가로서 망국의 한을 달래며 여생을
보냈다. 그의 작품세계는 주로 묵란을 중심으로 논의되지만
묵죽에서도 독특한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는 자신이 살던
서울의 집을 ‘죽동궁(竹洞宮)’이라 하였고 대나무가
울창한 상해의 집을 ‘천심죽재(千尋竹齋)’라고 불러
대나무에 대한 각별한 애호를 표시하였다. 이 작품은
줄기의 위 아래를 잘라 배치하여 대나무의 솟구치는
기세를 강조하는 한편, 짙은 댓잎들은 아래를 향하게
그려 넣어 화면 내에 긴장감을 유도하고 있다.

 

 

 

 

춘작희보(春鵲喜報) 보물 782

단원 김홍도(檀園金弘道, 17451806?)

 

김홍도 만년의 대표작인『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중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이 화첩에 그려진 그림들은
일상 생활 주변에서 흔히볼 수 있는 평범한 소재들을
산수 배경 속에 그리되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도록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대나무 몇 그루와 함께 이리저리
휘어져 자란 매화나무에 네 마리의 까치가 앉아 우짖고
있는 이 작품은 그림 공부 지침서인 화보(畵譜)의 구도를
본 뜬 것이지만 미묘하게 농담을 조절하여 풀어낸 필묵과
따뜻하고 서정적인 담채(淡彩)의 표현이 김홍도의
독자적 개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백자철화매죽문호(白磁鐵畵梅竹文壺)

조선 중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조선시대 선비의 곧은 기개를
보듯 기운차게 그려진 그림 맛이 일품인 항아리이다.
대나무와 매화를 따로 나누어 그렸는데
수묵화(水墨畵)를 그리듯 대담한 필치로 능숙하게 그렸으며
철화 발색이 자연스러운 농담에서 속도감과 생동감이 느껴진다.
마치 한 폭의 문인화(文人畵)를 보는 듯 하다

 

 

청화백자사군자문각병(靑華白磁四君子文角甁)

사각병(四角甁)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새롭게 등장하는 형태로
그 위에 사군자(四君子)나 풀꽃을 그려 장식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 작품은 그 대표적인 예로, 형태도 깔끔하지만 각 면에 능숙한
솜씨로 그려진 매난국죽(梅蘭菊竹)의 그림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엄정하면서도 깔끔한 형태와 그림과 배경의 선명한 색 대비는
강직과 충성을 상징하는 사군자(四君子)의 모습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국화(菊花)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06?)

국화는 은일(隱逸) 인고(忍苦)와 지조를 상징하는 꽃으로
그 상징성과 관련하여 은군자(隱君子) 은일화(隱逸花)
중양화(重陽花) 오상고절(傲霜孤節) 상하걸(霜下傑)
동리가색(東籬佳色) 등으로도 불린다. 이 작품은
탐스럽게 핀 황국(黃菊)과 백국(白菊)을 그린 것으로
먹과 담채의 농담을 미묘하게 조절하여
가을의 소슬한 분위기를 더욱 살리고 있다.

 

 

 



탄은 이정(灘隱 李霆, 15411622)
이정은 세종의 현손(玄孫)으로 시·서·화에 모두 뛰어난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는데 특히 묵죽을 잘 그려 조선 제일의
묵죽화가로 칭송되었다. 댓잎의 끝이 가늘고 날카로우며
꼿꼿하게 마무리져 있어 대나무의 고결한 기상이
느껴지는 한편 가까운 곳의 대나무는 농묵(濃墨)을 써서
분명하게 그리고 뒤쪽의 대나무는 안개에 싸인 듯
담묵(淡墨)으로 은은하게 표현하여 서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이정 이후의 조선 묵죽화는
거의 그의 양식을 토대로 하여 발전하였다.


 

 

 

 

 

 

 

 

 

 

 

 

 

청죽(靑竹)

해강 김규진(海岡金圭鎭, 18681933)

 

김규진은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활동한 대표적인서화가로
젊은 시절 8년간 청나라에 머물며 서화를 수련하였고
귀국 후에는 어린 왕세자였던 영친왕의 서법사부로 임명되는
등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그는 행서와 초서 특히 손수 만든 큰 붓으로 쓰는

대필서(大筆書)에서 특출한 필력을 발휘하였고 그림은
힘차고 거침없이 표현하는 사군자등의 문인화에 치중하였다.
그의 묵죽도는 수묵만으로 호쾌하게 그린 것이 가장
전형적인 것인데 비해 이 작품은 화려한 채색을 써서
아름답고 세밀하게 그린 것이다.


 

 

 

 

 

묵죽(墨竹)
수운 유덕장(岫雲 柳德章, 16751756)

유덕장은 조선초기의 신잠(申潛) 신사임당(申師任堂)등과 함께
최고의 묵죽화가로 이름이 높았던 유진동(柳辰仝) 6대손으로
가문의 전통에 따라 묵죽화에 전일(專一)했던 사대부화가이다.
가전(家傳) 화풍보다는 탄은 이정(李霆)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이정(李霆)의 화풍을 계승하였으며 이정(李霆) 신위(申緯)
더불어 조선시대의 3대 묵죽화가로 꼽힌다. 유덕장의
묵죽은 이정에 비해 좀더 부드러운 필치를 보여주며 추사
김정희가 평한 대로 창경(蒼勁)하고 고졸(古拙)한 맛이 있다.
이 작품은 유덕장이 73세 때 그린 만년작으로 전체는 8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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