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

김서정이 작곡하고 이정숙이 노래한 "강남달"

덕여 (悳汝) 2011. 8. 22. 17:14

 

우리가 ‘유행가’라고 부르는 한국 대중가요는 1927년 ‘낙화유수’라는

무성영화가 상영되던 단성사에서 김서정이 작사 작곡한 주제가

낙화유수(강남달)’를  이정숙이 부른 것을 그 시발로 본다.

당시에 일본 노래 번안곡이나, 윤심덕의 ‘사의 찬미’와 같이 외국곡에
가사를 부친 노래는 있었으나, 우리가 손수 작곡한 우리 노래는 없었다.

물론 전수린이 작곡한 ‘원정(怨情)’이나 ‘황성옛터(慌城의 跡)’ 같은 막간가요가

만들어진 시기도 ‘낙화유수‘와 비슷했거나 1, 2년 앞섰을 수 있으나,
구전으로만 전하고 공식적인 기록이 없으며, 레코드판도
’낙화유수’가

제일 빨라서 ‘낙화유수(강남달)’를 우리 가요의 시발로 보는 것이다.

 

 

이정숙이 처음 불렀던 "낙화유수"가사

강남달이 밝아서 님이 놀던 곳
구름 속에 그의 얼굴 가리워졌네
물망초 핀 언덕에 외로이 서서
물에 뜬 이 한 밤을 홀로 새울까

멀고 먼 님의 나라 차마 그리워
적막한 가람가에 물새가 우네
오늘밤도 쓸쓸히 달은 지노니
사랑의 그늘 속에 재워나 주오

강남에 달이 지면 외로운 신세
부평의 잎사귀엔 벌레가 우네
차라리 이 몸이 잠들리로다
님이 절로 오시어서 깨울 때까지

 

무성영화‘낙화유수’의 각본을 쓰고, 주제가를 작사, 작곡한 김서정(金曙汀)은
1920-30년대에  활동하던 활동사진(무성영화)의 인기 변사이며
(단성사, 조선극장의 주임변사) 영화감독인 김영환(金永煥)의 예명이다.

노래를 작사, 작곡할 때는 김서정이라는 이름을,
영화감독, 변사 등의 다른 활동에서는 김영환이라는 이름을 주로 썼다.

진주 기생의 아들로 알려진 김영환은,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1924년에 무성영화‘장화홍련전’의 감독으로 데뷔한 영화감독이지만,
감독뿐 아니라, 영화각본을 쓰고 변사활동까지하는 만능 연예인이었고,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영화주제가 중심의 창작가요를 작사, 작곡하는 등

여러 예능부문에서 활동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김영환의 손을 거친 영화는
‘장화홍련전’(감독,1924),‘낙화유수’(원작, 각본,1927),
‘세동무(세걸인; 각본, 감독,1928)’, ‘약혼’(각본, 감독,1929)’,
‘젊은이의 노래‘(감독,1930), ‘연애광상곡’(각본,감독,1931),
‘탄식의 소조’(감독, 출연,1934) 등이다.

그 중 ‘장화홍련전‘은 10만의 관객을, 세동무는 15만의 관객을 동원하여
당시로는 이례적인 흥행을 기록한 작품이고, ‘낙화유수’와 ‘세동무’는 
10년간의 모든 영화중에서 10편의 우수영화를 뽑는 조선일보영화제에서
무성영화부문의 우수영화로 선정되기도 했다.

김서정이 작사, 작곡한 노래는 ‘낙화유수’(1927, 이정숙, 강석연, 김연실),
‘세동무’(1928, 김연실), ‘암로’(1930, 강석연), ‘봄노래’(1930, 채규엽),
‘강남제비’(1931, 강석연, 이애리수)‘, ’유랑의 노래’(1931, 이애리수) 등
주로 영화 주제가였다. 그 밖에도 ‘님 찾아 가는 길’(1933), ‘추월색’(1934)
등 10여 곡 정도가
더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초의 창작 가요 ‘낙화유수(강남달)’는 1927년에 무성영화 "낙화유수"가
상영되던
단성사 극장 무대 아래서 이정숙이 악단의 반주 속에 직접 부른
주제가이다.
이 노래는 영화의 인기 못지않게 독자적인 인기를 얻어 전국으로
퍼져나가
2년 뒤(1929)에는 음반으로도 발매되었고, 노래 잘 부르는 인기배우
김연실이 부른 음반(1930년)이 나온 후
더욱 널리 보급되었다.
‘강남 달‘로 알려져 있는 이 노래는 ’60년대의 황금심, 신카나리아 등과
최근의 한영애에 이르기까지 여러 명의 가수에 의해 리바이벌 되었다.

무성영화 [낙화유수]는 진주기생과 한 화가와의 사랑이
비운으로 끝을 맺는다는 멜로물로 단성사에서 크게 흥행한 작품이다.
이 영화의 스토리와 주제가의 노랫말은 진주 기생이었던 자기 어머니의 이력과
김서정 자신의 성장 환경과 관련된 자전적 성격이 짙은 것으로,
영화화되기 전에 이미 4막 5장의 연극으로 무대에 올린 적이 있는 작품이다.
주제가‘낙화유수(강남달)’를 부른 이정숙은 중앙보육학교
(중앙대학교 전신)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동요를 주로 불렀던 소녀이며

이 영화를 감독한 이구영의 동생이다.


김서정(김영환)은 그 시대의 일류 변사, 영화감독, 시나리오작가,
작사가, 작곡가, 바이올린 주자로서 장안 최고의 인기인이었다.
돈을 물쓰듯 쓰고 인력거로 권번가를 누비며 화려한 생활을 하였으나,
방탕과 좌절의 세월을 보내다 마약에 중독되어 1936년 요절하였다.
SP판으로 보관된‘젊은이의 노래’‘부활’‘세동무’‘심청전’
‘풍운아’등 몇 편의 무성영화의 편집된 육성대사와
여배우와 함께 취입한 만담 넌센스 등을 제외하면
그의 활동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것은 매우 유감이다.

김서정은 음악을 공부한 정통파 음악인이 아니지만, 그가 작사 작곡한
노래가
지금까지 계속 대중 속에서 이어져 온 것이 증명해 주듯이,
대중성과 음악성을 함께 지닌 가요를 창작한 훌륭한 음악인이었다.

특히 일본 엔카의 번안곡이나 변형된 민요뿐이었던 당시의 우리 대중 음악계에
새로운 창작가요를 내놓아 한국 유행가의 새시대를 열게 했다는것 만으로도
김서정의 공적은 높이 평가 받아야 할 것이다.

그는 춘사(春史) 나운규(羅雲奎)가 감독 출연한 영화 ‘아리랑(1926)’의
주제가
‘신조아리랑’(나운규 작사, 김서정 편,작곡)을 만들어 '아리랑' 개봉
극장무대 아래서 직접 연주하여, 오늘날
세계각국에 나가 있는 동포들이
가슴을 절이면서 부르는 민요‘아리랑’이 있게 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가 남긴 음악적 성과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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