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강산 답사

한양의 풍경과 도성문(都城門)

덕여 (悳汝) 2011. 8. 24. 11:33

 

  한양의 풍경과 도성문(都城門)

 

  서울의 내사산(백악,타락산,인왕산,목면산)은 아름다운 형승(形勝)을 만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군사적으로 서울을 지키는 훌륭한 방어산 구실을 하였다. 그 네 산의 능선을 따라 석성을 쌓은 것이 도성이고, 이 도성 안이 한양, 즉 서울이다.

서울을 가르키는 말로는 경성(京城), 도성(都城), 한성(漢城), 황성(皇城)등이 있다. 이런 이름들에 성(城)자가 붙은 까닭은 서울이 성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도성이란 말은 서울을 가르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을 가르키는 말로 성곽의 길이는 약 17키로미터 높이는 7.57m 너비는 5.45~7.57m가 된다.

  성 안과 밖을 연결시켜주는 문으로는 동서남북에 네대문을 내고, 그 사이사이에 소문을 내어 모두 여덟 개의 문이 있었다. 사대문의 이름은 유교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인 오상(五常 : 仁義禮智信)를 각각 도성문에 한 글자씩 붙여 지었다.

  동대문이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 돈의문(敦義門), 남대문 숭례문(崇禮門)인데 오상에 따르면 북대문은 '지(智)'자가 들어가야 하나 정(靖)'자를 넣어 숙정문(肅靖門이라 했다. 꾀 '정(靖)'이 슬기 '지'와 뜻이 통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소문의 이름은 동소문이 혜화문(惠,化門) 서소문이 소의문(昭義門), 남소문이 광희문(光熙門) 그리고 서북쪽의 소문이 창의문(彰義門) 또는 별칭으로 자하문(紫霞門)이라 했다.

  도성과 문들은 조선 초기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지 2년 후인 1396년(태조 5)에 처음 개축하였다. 그때 험한 지역은 돌로, 평탄한 지역은 흙으로 쌓았다. 세종 4년에 도성을 수축하면서 변이 30~40센티미터 되는 자연석으로 쌓았으며, 숙종 30년 어간에 다시 수축을 하면서 한 변이 두자, 곧 60센티미터 정도되는 네모 반 듯한 돌을 틈새 없이 맞추어 쌓았다. 1898년 전차가 놓이면서 흥인문(興仁門 : 동대문)과 돈의문(敦義門 : 서대문) 주위의 성곽이 일부 헐렸다.

1907년 순종이 일제에 의해 황제가 될 무렵인 7월 30일 '성벽위원회'가 설치되었고, 10월 16일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가 서울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때 비루한 문을 통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숭례문의 좌우 성벽을 헐고 옆으로 길을 냈다. 이때부터 성벽을 본격적으로 허물기 시작했다.

  홍인문(동대문), 숭례문(남대문)은 다행히 몸체는 보존되었으나 성벽이 떨어져 나갔고 광화문(남동문), 창의문(서북문)은 길 옆으로 비켜 앉아 문이 아니라, 그저 기념물이 되어 버렸다.

  동북문인 혜화문이 근년에 복원이 되었으나 길 옆 축대 꼭대기에 있어 전혀 문이라는 생각이 들지않고, 숙정문(북대문)역시 1970년 복원되었으나 허가를 받아야 접근할 수 있는 통제구역에 있어서 아쉽다. 그리고 돈의문(서대문), 소의문(서소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서대문구, 서소문동이라는 지명으로 간신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