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다리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는 말의 유래
요사이는 별로 쓰지 않는 말이지만 수 십 년 전만 해도 어른들이 아이들을 놀릴 때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고, 너를 낳은 엄마는 지금도 다리 밑에서 예쁜 옷과 맛있는 음식을 해놓고 울면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면, 처음에는 믿지 않던 아이들도 정색을 하고 몇 번씩 이야기하는 어른들의 꾐에 넘어가서 결국은 울음을 터뜨리곤 하였다.
그런데, 이때 인용되는 다리는 아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유명한 다리다. 서울의 경우는 청계천 다리가 가장 많이 등장하였다.
그 까닭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이야기를 만들어야 신빙성이 높아 아이가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이 말은 과연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이 말이 처음 생겨난 곳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소수서원 옆에 있는 ‘청다리’이다.
순흥은 삼국시대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원래 고구려 땅이다가 신라에 편입된 곳이다. 고구려 때는 급벌산군이다가 신라 경덕왕 때 급산군이 되고 고려 때는 흥주로 되고 조선 초에 순정 혹은 순흥으로 되었다. 이러한 역사를 지니는 순흥은 영남지역의 문화 중심지로 그 명성을 떨쳤는데, 북쪽에는 송악이 있고 남쪽에는 순흥이 있다고 할 정도로 큰 도시며 문화의 중심지였다.
비가 올 때도 비를 맞지 않고 처마 밑으로 십리를 간다는 말은 순흥의 번성을 잘 표현하는 말이다. 그런데 조선 세조 때 이곳으로 유배된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역모의 땅으로 지목되어 쇠망의 길을 걷게 된다.
그 때의 아픔은 지금도 이 지역에 금성단, 위리안치지, 압각수, 경자바위, 피끈(끝) 등의 유적지와 전설로 남아있다.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은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소수서원은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의 사묘로 백운동서원을 건립한 것이 시초로 1550년 풍기군수로 있던 퇴계 이황이 임금으로부터 소수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조선 사립대학의 효시인 소수서원이 문을 열자 각처의 선비들이 공부와 수양을 위해 이곳 서원으로 모여들었고 순흥도 다시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소서서원에 유학을 온 선비들은 주로 젊은이였고, 이들이 이곳의 처녀들과 눈이 맞으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남녀가 사랑을 하면 거의 필연적으로 생기는 것이 바로 아기의 출산이다. 요즘처럼 의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라 임신을 하면 낳을 수 밖에 없었다.
조선조 사회에서 혼인하지 않은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라 집안에서는 비밀리에 이 일을 해결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갓 태어난 아기를 강보에 싸서 밤중에 소수서원 옆에 있는 청다리 밑에 갖다 놓았다.
이 소문이 퍼져나가자 이번에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그 당시 선비라면 최고의 신분이고 똑똑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핏줄을 데려가 기르는 것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집안에서는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이리하여 멀리서 아이를 주우려 온 사람들은 운이 좋으면 도착한 다음날 새벽에 아이를 얻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운이 나쁘면 몇 달씩을 기다려서 아이를 얻어가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생겨난 “청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은 오랜 세월 변화를 거듭하여 근대에 와서는 해당 지역의 다리이야기로 탈바꿈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순흥의 청다리는 이런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유적인데, 지금은 그저 평범한 다리에 불과하다.
한편 청다리에는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니, 효 불효 설(살아있는 부모에게는 효도지만 죽은 부모에게는 불효가 되는 이야기)에 근거한 전설이라서 더욱 흥미롭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의 일이었다. 소백산에서 시작한 물이 죽계구곡을 지나 지금의 청다리 쪽으로 흘러오는데 그 때는 이곳에 다리가 없었다.
죽계천의 남쪽 마을에는 곱디고운 청춘에 홀로 되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키우면서 외롭게 살고 있는 과부가 있었고 죽계천 북쪽 마을에는 짚신을 삼아서 파는 짚신장수 홀애비가 살고 있었다.
이 짚신장수 홀애비가 순흥 시장에 짚신을 팔러 갔다가 과부와 눈이 맞았다. 그러나 자유연애가 금지되었던 옛날에 두 남녀가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밤이 깊어지면 과부는 죽계천의 물을 건너서 짚신장수를 만나러 갔다가 이른 새벽에 돌아오곤 하였다.
봄 여름 가을에는 괜찮지만 추운 겨울에 발을 적셔가며 물을 건넌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었다.
이 일을 눈치챈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서 돌다리를 놓아드렸다. 그러나 돌다리도 역시 춥고 어두운 겨울 밤에 건너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때 마침 순흥 고을로 중앙에서 높은 분이 내려온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 소식을 들은 아들은 높은 분이 지나갈 때를 기다려서 그 앞에 나아가 어머니의 일을 고하고 다리를 놓아달라고 청원을 하였다.
이 사연을 들은 높은 나으리가 아들의 효성에 감동하여 다리를 놓아주었다.
이렇게 청을 넣어서 놓은 다리라 “청다리” 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청다리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는 불효를 저지르고, 살아있는 어머니에게는 효도를 하게 된 것이니, 불효라고 하기도 어렵고 효도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다리를 “효불효다리” 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