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
박태준(호, 청암)포스코 명예회장 "세계최강 포스코 돼라" 유언
덕여 (悳汝)
2012. 1. 4. 12:12
24년간 포스코 회장 남긴 재산 얼만가 보니 집 한채 주식 한주도 없이…철강왕 큰별이 지다 박태준(호, 청암)포스코 명예회장 "세계최강 포스코 돼라" 유언
포스코 설립자인 `철강왕` 박태준 명예회장이 별세한 13일 저녁 포항 포스코 본사. 퇴근하려던 직원들은 다시 회사로 발길을 돌렸다. 박 명예회장이 세상을 떠난 날 그들은 포스코를 떠날 수 없었다.
직원들에게 고인은 단순한 명예회장이 아니었다. 박 명예회장에게 철이 국가였듯, 직원들에게는 박 명예회장이 곧 철이요, 포스코였다. 박태준 명예회장이 이날 오후 5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4세. 그는 만 24년을 거대 기업 최고경영자로 있었지만 집 한채, 주식 한주 없이 갔다. 미국에 거주하는 둘째 딸 유아씨 소유의 서울 한남동 집에서 살았고 그 스스로 가진 돈이 없어 가족들이 병원비를 보태야 했다.
국가를 위한 봉사에 대가를 바라지 않았던 고인은 좌우명대로 `짧은 인생을 영원히 조국에` 바쳤다. 호흡곤란 증세로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면서 그는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옴을 느꼈다. 지난 5일 중환자실로 옮기기 전 유언을 남겼다.
철강왕은 마지막 순간까지 국가를 잊지 않았다. "포스코가 국가산업의 동력이 되어 만족스럽다. 더 크게 성장해서 세계 최강의 포스코가 되었으면 한다. 포스코 임직원은 애국심을 가지고 일할 것을 당부한다"고. 그러면서 그는 "포스코 창업 1세대들이 어렵게 사는 사람이 많아 안타깝다"며 남은 식구들을 걱정했다. 전 세계 주요 인사들이 고인을 가리켜 `미국 카네기를 뛰어넘는 철강왕` 이라 평할 정도로 그가 전 세계 철강사에 남긴 족적은 위대했다.
1990년 당시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박 명예회장에게 외국인으로는 최고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르`를 수여하면서 "한국에 봉사하고 또 봉사하는 것이 당신(박태준) 인생에 영원한 지상명령이었다"고 치사하기도 했다.
그는 1968년 포항제철 초대 사장에 올라 한국 근대화를 위한 초석을 마련한 뒤 25년 만에 포항제철을 세계 3위 철강사에 올려놓는 등 신화를 창조했다. 그는 "포철을 정치적 외압으로부터 지키겠다"며 정계에 뛰어들었지만 1993년 문민정부 출범 후 정치적 박해를 받고 4년간 망명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1998년 김대중ㆍ김종필ㆍ박태준 연합으로 정권을 잡은 뒤 2000년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는 부인 장옥자 씨와 진아 유아 근아 경아 성빈 씨 등을 유족으로 남겼다. 고인은 유언을 통해 "아내에게 고생시켜서 미안하다. (자식들과)화목하게 잘살아 달라"고 말해 주위 사람들 마음을 숙연케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박 회장 별세 소식을 접하고 "우리나라 산업화에 공이 큰 분이 우리 곁을 떠나게 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박정하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고재만 기자, 남기현 기자,문일호 기자]
無私, 포스코 기업공개 할때 "단 1株도 받을수 없다"
해고직원 어머니 눈물 못잊어 몇년뒤 재고용
무사(無私). 인간 박태준을 논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단어는 다름 아닌 `무사`다. 인간 박태준은 그야말로 사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좌우명을 달고 사는 사람은 많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고 박태준 명예회장만큼은 본인 좌우명대로 살려 노력했고 일생을 통해 그것을 실천했다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듯하다.
생전 박 명예회장 좌우명은 `짧은 인생을 영원히 조국에`였다. 박 명예회장은 늘 "사심 없이 헌신하라.
무한 경쟁 시대일수록 사심 없는 헌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무사(無私)함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있다. 1988년 포항제철이 첫 기업공개를 할 때, 박 명예회장은 "힘들게 일하는 일반 직원들에겐 주식을 나눠줄지언정 나를 비롯한 임원들은 단 1주도 받을 수 없다. 경영진이 사리사욕에 사로잡히면 기업을 제대로 이끌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박 명예회장은 주식을 단 1주도 갖지 않는 `무소유 경영`을 실천했다. 철저하게 `사심`을 배격한 박태준이었지만, 그는 깊은 인간미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포항제철을 맡기 전 박 명예회장은 대한중석 대표(1964년)를 맡고 있었다. 당시 그가 가장 강조한 덕목은 다름 아닌 `청결`이었다. "기업, 특히 국영기업에서 인사 청탁을 한 사람은 반드시 일벌백계하겠다.
우리는 국민에게 봉사하는 公人이다. 사기업체 종업원과는 달라야 한다." 이런 엄포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를 통해 인사 청탁을 시도한 한 젊은 직원이 발각됐다. 박 명예회장은 일고의 고민도 없이 그를 해고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그 직원 어머니가 서울에 올라와 박 명예회장을 만났다. 이 어머니는 박 명예회장을 만나자마자 눈물을 벌컥 쏟아내며 하소연을 시작했다. 이후 1968년 박태준은 포항제철 초대 사장에 임명됐다. 박태준은 3년 전 자신에게 눈물로 호소했던 직원 어머니를 잊지 않았다. 잘못을 저질렀던 그 아들을 포항제철에 취직시켜 새로운 기회를 준 것이다.
인간 박태준은 `타고난 친화력`보다 `노력하는 인간관계`를 선호하기도 했다. "제철사업 초기에 일본에서 배울 게 너무 많았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쉽게 노하우를 알려주겠나. 그래서 이나야마 요시히로 신일본제철 회장이 즐겨 부르는 일본 노래를 미리 연습해 술 마실 때 부르기도 하고 새로운 일본 유행가를 미리 연습하기도 했다. 술도 일부러 열심히 마셨다. 결국엔 이나야마 회장이 내 인간성을 파악하고 애국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하더라." [남기현 기자]
■ 박태준 "나라 위해 일한게 뭐 대단해" 쇳물보다 뜨겁게 살다
"국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는 인격도 버렸다." 1970년대 초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제철소를 짓기 위해 고 박태준 명예회장은 직원들에게 매질도 서슴지 않았고 무릎도 수없이 걷어찼다. 그러나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의 무서운 추진력에 사심(私心)이 없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군인이자 정치가이며 미국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를 뛰어넘는 인물로 불리는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그의 삶은 `쇳물보다 뜨거운 열정`으로 요약된다. 그는 열정만으로 숱한 위기를 넘었다. 청암은 1970년 포항에서 제철소 건설 공사를 시작해 1973년 6월 9일 국내 최초의 고로(용광로)를 준공하는 감격을 맛본다.
`산업의 쌀`이라는 철강의 자급시대를 연 것이다. 제철소 건설은 원칙적으로 제품이 생산되는 순서에 따라 제선ㆍ제강ㆍ압연공장 순으로 건설하는 포워드(Forward)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박 사장은 거꾸로 공장을 짓기 시작해 수입한 반제품을 활용하는 길을 택했다. 이런 역발상 덕분에 6개월 만에 흑자를 내는 기염을 토한다.
박 사장은 제철소 건설 과정에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박 사장은 "선조들 피와 땀이 담긴 일본 차관을 이용하는데 제철소 건설이 실패하면 우향우하여 동해 바다에 빠져 죽자"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그의 리더십은 당근과 채찍으로 대변되는데, 당근은 다름 아닌 사원주택 건설이었다. 그는 제철소 건설 이전에 사원주택을 짓느라 주변에서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제철소 건설에 대해 박 사장은 세 가지 원칙을 분명히 했다. 건설공기 단축, 건설단가 최소화, 부실공사 불허 등이 바로 그것. 특히 부실공사 불허와 관련해 그의 완벽주의 면모는 유명하다.
1977년 여름 포항제철소 공사현장을 둘러보던 박태준은 발전송풍 설비 콘크리트가 울퉁불퉁한 것을 보고 불호령을 내린다. 이미 공사가 80% 이상 진척됐지만 부실공사가 분명했기 때문에 타협은 없었다. 직원들이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이 설비 폭파 기념식을 거행한다. `어떤 부실공사도 용납하지 못한다`는 박태준의 호한 의지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당시 시공을 맡았던 삼환기업 은 이후 다시 는 포스코 공사를 맡지 못한다.
그의 독특한 경영방식은 군인 출신이라는 박태준의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27년 경남 동래군에서 태어난 청암은 1933년 가족들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다. 총명했던 그는 1945년 와세다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지만 전쟁에서 패한 일본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판단해 대학을 중퇴하고 귀향해 부산 국방경비대에 자원 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최전선에서 중대를 지휘했고 능력을 인정받아 국방부 요직을 두루 거치다가 1963년 육군 소장으로 군생활을 마친다. 1948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청암은 당시 탄도학을 가르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교관으로 만난다. 1961년 5ㆍ16 군사혁명 당시 정작 박태준 회장은 혁명동지 명단에서 제외됐다. 이틀이 지나 박태준 회장이 찾아갔더니 박정희 전 대통령은 "혁명이 실패하면 임자라도 살아남아 군을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돼야 한다"며 "만일 내가 사형선고를 받고 이 세상을 떠나면 자네에게 내 처자를 돌봐 달라고 부탁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 맡은 직책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이다. 1970년 제철소 건설 과정에서 각종 이권 개입 문제가 발생하자 박정희 전 대통령은 친필로 쓴 `설비 구매에 관한 재량권 위임(일명 종이마패)`를 박태준 회장에게 전달할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 이를 통해 청암은 어떠한 외부 입김이나 권력 간섭 없이 자기 뜻을 펼칠 수 있었다. 철강왕으로 불리는 카네기는 35년 동안 연산 조강생산량 1000만t을 이룬 데 비해 청암은 25년(1968~1992년) 동안 2100만t을 달성했다. 기술력과 자본력이 전혀 없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업적인 셈이다. 그러나 청암은 자신이 영웅시되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인재 육성을 위해 설립한 포스텍 (포항공대)에서 박태준 동상 제막식이 열렸지만 일부러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주변 사람에게 "국가를 위해 일한 게 뭐가 대단한 일이라고"라며 겸손했다. 그는 일찍부터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인식해 86년 포스텍, 87년 포항산업과학연구원을 설립해 산학연 연구체제를 구축하기도 했다. 그는 과거 매일경제신문 인터뷰에서 "아무리 투자해도 부족한 게 인재 육성"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강계만 기자 / 문일호 기자]
■ 내가 만난 박태준 "뭐든지 일류가 돼야…내 꿈은 끝나지 않았다" 2008년 7월 23일 좀처럼 언론과 인터뷰하기를 꺼렸던 박태준 명예회장을 직접 만날 기회를 얻었다. 3개월 넘는 설득 노력 끝에 겨우 잡은 소중한 인터뷰였다.
박 명예회장을 빼고선 당시 매일경제신문이 진행하고 있던 `건국 60년 특별대담`은 무의미하다는 의견을 계속 전달했고 결국 승낙을 받아냈다.
서울파이낸스센터에 위치한 박 명예회장 사무실에서 가장 처음 눈에 띈 것은 책상 위엔 놓은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이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은 나에 관한 한 120% 믿어줬다. 그래서 나는 모든 생활에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늘 자신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박 명예회장에게 박 대통령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당초 인터뷰 시간은 30분 정도만 진행하기로 했다.
당시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를 고려해서다. 하지만 박 명예회장과 함께 과거로 떠난 여행은 2시간 넘게까지 이어졌다. 그는 2시간 넘는 인터뷰 내내 양복 윗도리 단추를 풀지도 않았을뿐더러 단 한 차례도 흐트러진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평소 철저했던 자기관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 급성장하는 중국에 강한 경계심 "능력이 없으면 다 뺏기고 말 것" 리더십에 대해 물었다. 박 명예회장은 "나는 군에서도 그랬지만 바른 일해서 모가지가 잘리는 것이라면 언제든지 좋다고 생각했다"며 "무슨 조직이든 (리더는)쓸데없는 생각을 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특히 "지휘감독도 포인트가 있어야 하는데 그걸 판단하지 못하면 밤새도록 공장을 돌아다녀야 하지 않겠느냐"며 "최고경영자는 체크 포인트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포스코 주식 한 주도 갖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명쾌했다. 그는 "그 좋은 자리 많이 차지했고, 하려고만 했으면 천하의 부자가 됐을 것"이라며 "나에게 철은 인생이고 곧 국가였다"고 강조했다.
처음 제철소 건설 당시 1억달러가 없어서 꿈을 접었을 때 교차했던 분노와 서글픔이 아직도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고 덧붙였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아직도 내 꿈은 끝나지 않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사무실 벽에 붙어 있는 인도 베트남 중국 사진들과 함께 커다란 아시아 지도는 당시 박 명예회장의 고민과 관심사가 뭔지 단적으로 보여줬다. 특히 급성장하는 중국에 대한 경계심이 컸다.
박 명예회장은 "대단히 걱정스럽다. 웬만하면 다 뺏길 것 같다"며 "대중국 전략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한국은 굉장히 어려운 시기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선진화를 빨리 해야 한다. 능력이 없으면 중국이나 러시아 등에서 마음대로 해버릴 수 있다"며 "우리가 역량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지금보다 불행해질 수 있다"고 염려했다.
박 명예회장은 "젊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가져야 한다. 절대 일류가 돼야 한다. 뭐든지 일류가 돼야 한다는 게 나에겐 일생을 살아가는 정신 요소였다"고 강조했다. 내가 본 박태준은 강인한 군인정신과 함께 투철한 애국심으로 뭉친 철의 사나이였다. 그는 늘 절대 일류를 추구했고, 또한 반드시 이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2시간 동안 이어진 인터뷰는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과 함께하고 싶었던 뜨거운 강연이기도 했다. [송성훈 기자]
◆ 포스코 45년이 불굴의 역사였 듯
대학 설립도 또다른 역사의 시작 남대문 소실 사건으로 나라가 시끄러웠던 2008년 2월. 기자는 박태준 명예회장에게 한마디를 들어보고자 무작정 포항행 비행기에 올랐다. 좀처럼 대외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본인 열정이 담긴 포스텍(포항공대) 학위 수여식에는 참석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행사가 끝난 뒤 어렵게 만난 박 명예회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어떻게 나라가 이 정도가 될 수 있느냐. 부끄럽다. 정말 부끄럽다." 박 명예회장은 "부끄럽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었다. 그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면서 그는 오랜 지인인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에게서 이날 편지 한 통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박 명예회장은 "나카소네 전 총리에게 위로를 받았지만 정말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며 "도대체 어떤 사람이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느냐"고 격분한 감정을 가감 없이 쏟아냈다. 그는 포스텍 설립 이사장이다. 박 명예회장은 "처음에 학교를 만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다 미친 짓이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포스코 역사가 불굴의 역사이듯이 포스텍 역사는 또 다른 역사의 시작이었다. 그는 또 "과학기술 인재 육성론은 내가 늘 주장해왔던 점"이라며 외환위기 이후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이끈 10년간 분배 강조 정책이 실패했다고 꼬집었다. 박 명예회장은 "흔히 `88세대`라는 가슴 아픈 유행어가 통용되고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직하고 싶다는 젊은이들의 절박한 하소연이 끊임없이 들려온다"며 당시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포스코 창립 40주년을 두 달여 앞둔 시점이었다. `철강왕`인 박 명예회장은 빌 게이츠를 벤치마킹 대상으로 거론했다. 박 명예회장은 "게이츠는 창조적 자본주의와 친절한 자본주의를 주창하고 있다"며 "리더십은 방법론적 공부만으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게이츠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위대한 리더십의 가능성이며, 세계 젊은 인재들이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언제나 자기보다 나라가 먼저였고 사람 욕심이 앞섰던 큰 어른이었다. [박용범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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